책을 읽고서

이영도, 피를 마시는 새

guno 2012. 8. 4. 15:18

 

 

목차

“눈물을 마시는 새가 왕이었다면, 피를 마시는 새는 바로 왕국이다.”

1. 황제사냥꾼

2. 제국의 대장군

3. 유혈의 지배자

4. 불을 휘두르는 자

5. 발케네의 주인

6. 빗속을 걷는 레콘

7. 자신을 태우는 자

8. 하늘을 딛는 자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짐도 남기기 싫다.

 

상냥함의 이면에는 간혹 거론키 어려운 오만한 감정이 숨어있어서 상냥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모든 사람이 서로를 깔보는 마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버릇.

 

그가 떠난 뒤 그녀는 자신의 일부가 그와 함께 떠났다고 느꼈다.

 

제 그릇에 담긴 물이 당신의 갈증 때문에 늘어나진 않아요.

 

인간들의 결혼에서 수컷은 만족할 수 없고, 암컷에겐 미래가 없어 바람을 피우게 된다. 남자가 아내보다 훨씬 모자란 여자하고도 바람을 피우는 건 그냥 다른게 그립기 때문이지. 하지만 보통 여자들은 남편보다 훨씬 괜찮은 남자하고만 바람을 피우지. 더 나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진부함이 꼭 진실을 훼손하지는 않는다.

 

사과의 표면을 아무리 핥아도 사과의 맛은 느낄 수 없다.

 

누군가가 법 위에 설순 있겠지. 하지만 도덕 위에 오를 순 없어.

 

도덕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후천적인 습득물일 뿐이고 위장의 공격에 취약하다. 소화시켜야할 다른 음식이 없으면 위장은 서슴없이 도덕을 소화시킨다.

 

우리는 모두 신에게서 육신을 임대해 살고 있다. 생명이 다한 후 다시 신에게 돌아가면 신은 우리의 육신을 재활용하는 것. 따라서 우리는 임대 계약 목적물의 사용 연한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은 음식의 하위에 있고 분변의 상위에 있다. 입이 위에 있고 항문이 아래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끊임없이 음식을 모아 나를 만들고 나를 다시 분변으로 바꾼다. 필사적으로 그 위치를 지켜야 한다. 땔감과 재 사이에 있는 불처럼.

 

불사는 그 개념도 모르는 자들의 허무맹랑한 소리다. 불사는 불생이다. 당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죽을 수 있다.

 

사악한 자만이 돈을 벌 수 있다는 선입관에서 벗어나라. 돈은 돈이고 품성은 품성이다. 그 사이에 다른 것보다 유별나게 밀접한 관계 같은 것은 없다.

 

어떤 이의 밤을 밝힐 기름이 다른 이들의 피 속에서 흘러나와서는 안 된다. 어둠을 쫓고 싶다면 그 스스로 불꽃이 되어야 한다.

 

생에는 여러 가지 갈림길이 있으며 그것을 지나칠 경우 다시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 마음은 참 이상해요. 빈 물통에 물을 채워 넣으면 더 이상 빈 곳이 없죠. 그런데 사람 마음은 흘러넘칠 만큼 채워 넣어도 빈 곳은 여전히 비어 있어요.

 

키탈저 인들의 조용한 거동에는 칼집에 든 칼을 연상시키는 바가 있었다. 필요할 때를 대비하여 칼집 속에 들어가 있다고 해서 칼이 몽둥이가 되지는 않는다. 한편, 같은 비유를 두 번째 이방인들에게 적용한다면 그들은 칼집을 잃어버린 칼 같았다. 노출된 칼이 굳이 휘둘러지지 않더라도 이곳저곳에 부딪히며 주위 사람뿐만 아니라 그 소지자까지도 상처입게 하듯 두 번째 부류의 이방인들은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성가신 사건들을 잔뜩 일으켰다.

 

시간은 시간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몸은 마음의 종이자 주인이기도 하다.

 

용감한 이는 한번 죽어 영원히 살고 용렬한 이는 죽지 않으려 하다가 한번도 제대로 살지 못한다.

 

제 아버님께서는 세상에 나가는 멍청한 아들이 교활한 사기꾼에게 당할까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장 많이 주는 사람은 가장 많은 것을 가져가려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앗아가기만 하는 내일이 유일하게 주는 선물은 예상치 못한 일이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은 축복이다.

 

자기 자신에게 미소를 보낼 수 있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하얀 하늘이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첫눈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설편들은 마치 커다란 나비 같았다.

 

말은 칼과 같다. 지나치게 길어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짧아도 문제다.

 

탁자위에서 미세하게 파닥거리는 나방을 보았다. 조금전 황홀경에 취해 촛불을 향해 돌진했던 것이 나방의 마지막 비행이었다. 불기운에 몸 어디를 다쳤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나방은 발을 하늘로 향한채 날개로 탁자를 때리고 있다. 아마 다시 날아오르기 힘들 것이다. 그 나방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나 다시 날아다닐수 있게 되면 나방이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했다. 다시는 불곁으로 가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다시한번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불을 향해 돌진하는 나방을 보게 될 것이다.

 

삶아 빨아서 하늘에 널어놓은 듯한 하얀 구름이 지평선으로부터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허무가 파도라면 나는 침몰했다.

 

사형의 진정한 대상은 범죄나 범죄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형에는 이미 저질러진 범죄를 원상복구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살인자를 수백, 수천번 매달아도 피해자가 부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형을 집행한다 해도 법리학자들의 호사스러운 말처럼 정의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형의 진정한 대상은 아무 관계가 없는 군중이다. 다른 이들에게 살인을 저지르지 말라는 강력한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살인자를 교수대에 매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형은 전시성을 가진다. 교수대가 높은 것은 전시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땀구멍으로 술을 흘릴 정도로 과음하고도 취하지 않아서 창백한 얼굴을 떨어트리고 있다.

 

외로운 잠자리는 아니었다. 통증과 수치심과 서러움 등 와글와글한 잠동무 때문에 침대 밖으로 굴러떨어질 지경이었으니까.

 

도망친 지평선을 추적했다. 지평선은 영원히 도망칠 수 있다는듯 자신만만하게 물러났지만 괘념치 않았다.

 

평야에서는 봄과 겨울의 싸움이 진행중이다. 겨울이 해소할 길 없는 시름처럼 쌓아 둔 얼음들은 봄의 따스함 속에 녹았지만 평평한 땅은 그것을 거센 물줄기로 바꾸는 대신 많은 실개천으로 바꾸었다. 처음부터 승부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겨울의 태도가 비장하다. 아직 자신에게 호의적인 밤에 기대어 겨울은 유격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언젠가는 죽은 겨울이 저녁이 되어도 살아나지 않는 아침이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