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해석 vs. 데인저러스 메소드
제드 러벤펠드 <살인의 해석> (2006년작)
1909년 8월 29일 호보켄 항구. 빈 출신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첫 미국 방문에 설렌 마음으로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클라크대학의 20주년을 기념한 특별강연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그에게는 두 명의 동행자가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취리히 출신의 카를 융이다.
역사적인 사실, 첫 방문이자 마지막 방문이 된 프로이트의 미국여행, 그리고 가장 아끼는 제자 융과 스승인 프로이트가 등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된 미국여행에 대한 궁금증을 추리소설로 꾸민 이 책은 미국에서 두 사람이 한 살인사건과 만나 그것을 해결하면서 각자의 입장과 생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픽션과 논픽션을 절묘하게 섞어놓아 마치 진짜 있었던 일을 전해 듣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이 책은 프로이트의 팬이 그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한 셈이랄까.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를 해석하고 싶어한 저자의 욕망이 일궈낸 또 하나의 꿈의 해석. 그러고 보니 또 다른 픽션 소설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와도 비슷하다. 이 책을 읽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다시 보게 된 사람이라면 <살인의 해석>을 읽은 뒤에는 ‘꿈의 해석’을 읽고 싶어질지도.
위대하달 수 있는 두 정신분석학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의 이야기를 정신분석에 관한 추리소설로 멋지게 집필한 작가는 제드 러벤펠드, 형법에 정통한 법률학자이자 현재 예일대 법과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프린스턴 대학 재학당시 졸업논문으로 프로이트를 선택할 만큼 지적인 문학청년이었고, 자신의 지식과 궁금증을 첫 소설 <살인의 해석>에 녹여냈다. 그리고 정신분석을 아는 사람이라면 프로이트파냐, 융파냐 하고 자신을 편 갈라 구분지으려 하는 와중에 이 책은 철저하게 프로이트의 편에 서서 융에 관한 험담을 늘어놓는다. 보통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까지 알고 있는, 매우 박식한 저자가 이죽거리며 설명하는 융은 허영심에 가득차 아버지를 배신하는 아들로 그려진다. 지적인 저자가 자신의 지식을 무기로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셈이다. 뭐 다른 예술은 그렇지 않던가.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있고, 예술가란 자신의 관점을 보다 멋지게 포장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녹아들도록 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니까.
프로이트와 융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는 것 이외에 이 책의 미덕은 바로 20세기초 뉴욕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재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매일 새 건물이 세워지는, 이제 막 건설 중인 뉴욕,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사람들은 턱시도를 입고 향수를 뿌려 자신의 과거를 숨긴 채 매일같이 화려한 파티를 연다. 성공과 유혹, 그렇지 못한 자들의 분노와 폭력이 극에 달한 뉴욕의 끈적한 분위기 속에서 한 소녀가 살해당한다. 뉴욕 최고의 호텔에서 잔인한 폭력의 얼룩을 남긴채. 실제 프로이트의 가장 유명한 환자였던 ‘도라’를 모델로 했다는 노라의 기이한 행동들, 아름답고 순수한 소녀의 것이라고 하기 힘든 어두운 욕망들이 어우러져 책 한권이 온전히 정신분석에 관한 새로운 재미를 부여한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햄릿에 관한 새로운 해석. "To be or not to be"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장이 아니었다는 것. 부정한 숙부와 어머니의 결혼식에서 축하연극의 대본을 직접 쓴 햄릿은 실제로는 아버지의 죽음을 재연해서 숙부를 놀라게 하고 그가 유죄를 시인하게 할 속셈이었다. 따라서 "To be or not to be"는 ‘그대로 있을 것이냐, 아니면 그렇게 보일 것이냐’를 뜻한다. 그냥 있을까, 그냥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행동할까 하는. 따라서 있음(to be)은 행동하지 않음(not to act)이 되고, 없음(not to be)은 행동하다(act)가 된다. 모든 행위는 연기고, 모든 실행은 연극이다. 이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다면 그에 따라 행동하고 연기해야 하다. 우리는 연기할 배역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연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살아있는 한.
데이빗 크로넨버그 <데인저러스 메소드> (2011년작)
이것은 마치 오마주 대결 같다. 제드 러벤펠드가 <살인의 해석>으로 프로이트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한 것처럼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융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혼신의 정열을 담아낸 이 정도의 오마주라니, 자신의 존경과 경의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두 남자가 멋지지 않은가.
사실 책에 비해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에 의지하는 만큼 텍스트가 부족하다. 이 영화는 키이라 나이틀리, 마이클 패스벤더, 비고 모텐슨 등 세 배우가 미친듯한 연기를 하는 바람에 흠뻑 빠져들었지만 그만큼의 해석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살인의 해석>에 등장하는 프로이트와 융, <데인저러스 메소드>에 등장하는 프로이트와 융은 그들을 어느 관점에서 주시하는가에 따라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카를 융의 환자이자 애인이었던 사비나 슈필라인과 융의 만남, 그녀를 상담하는 동안 융이 겪게 되는 고뇌와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조언을 하지만, 어느샌가 돌아설 수 없는 거리만큼 의견 차이를 보이게 되는 융과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살인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와 융의 결별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천착하고 있지만 결론은 매우 상반된다. <살인의 해석>에서 융은 아버지 프로이트를 넘어서고 싶은 허영심 많은 아들인데 반해 <데인저러스 메소드>에서 융은 아버지의 뻔한 대답에 의문을 제시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아나서는, 성장해서 독립하는 아들의 모습이다. 사비나 슈필라인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배운 이론과 현실에서 오는 문제의 혼란을 겪게 되는 융, 거기에 늘 뻔한 대답만을 강요하는 프로이트의 고지식한 모습은 감독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큭큭 웃음마저 자아낸다. "어이,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라구"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올 정도.
영화에서는 소품으로도 두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책과 물건으로 사방이 꽉 막힌 프로이트의 서재에 비해 하얀 벽과 커다란 창문, 여백의 미를 살린 융의 서재를 비교해보면 감독이 얼마나 두 사람의 차이를 보여주고 싶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가족을 대하는 입장의 차이, 프로이트는 늘 가족을 우선시하며 일과 생활을 분명하게 구분짓는 걸 프로다움이라 자부한다. 그는 아버지이자 남편임을, 정신분석학자임을 따로 또같이 자신을 규정하는 요소로 삼는다. 이에 비해 융은 자신의 분석에 열중한 나머지 일과 생활의 경계를 모호하게 오갈 뿐 아니라 그것을 구분짓는 것이 가능한가 하고 의문을 표시한다. 역할은 달라도 그는 자신일 수밖에 없으며 달라보여도 본질은 하나라는. 가족에 대한 입장 또한 매우 객관적인 거리두기를 기본으로 한다. 이는 마치 프로이트를 보수로, 융을 진보로 규정하려는 섣부른 시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제드 러벤펠드처럼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요소를 늘어놓고 이것봐 하는 소극적인 세뇌에 가깝달까.
<살인의 해석>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따사로운 가족애를 실천하며 자신의 제자들을 두루두루 보살피는 푸근한 남자, 한편 그 천재성을 감히 넘볼 수 없는 사람인 반면 융은 사랑하지도 않는 부자 아내와 결혼해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여자 환자들과 무분별한 연애를 즐기는 호색한, 프로이트의 애정과 관심을 자신에 대한 질투로 해석해버리는 망나니로 그려진다. 이에 반해 <데인저러스 메소드>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관념에 사로잡힌 외로운 학자, 그와 그의 가족들은 변화를 용납하지 않는 교회의 성직자들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융은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패기있는 철학자로, 그의 유복한 아내는 융의 자유분방함을 알지만 그를 아끼고 사랑하기에 그저 바라보며 끝까지 그의 연구를 지원하는 조력자로 표현된다. 학자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싶을만큼 화려한 생활과 연애편력을 가진 융의 모든 것이 그가 움켜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저 주어진 것이라는. 같은 상황인데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재밌지 않은가.
캐나다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공상과학에 심취해 있었다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82년 <비디오드롬>이란 영화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무서운 속도로 발달해가는 과학기술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신랄하게 풍자한 문제작(?)이라고 한다. 이후 헐리우드로 진출해 만든 것이 <플라이>를 비롯한 몇 편의 호러무비, 인간에 내재된 악마적 본성을 가장 무섭게 잘 그려내는 감독이라나. 여하튼 두 지적인 남자의 관점의 차이는 매우 재미있는 결과물을 낳았다. 문학을 좋아하는 법률가의 프로이트 지향. 공상과학에 심취한 호러무비감독의 융 지향성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너무 뻔한 조합이지만 그래서 재미있지 않은가.
두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는 다르지만 내가 두 작품을 며칠 간격을 두고 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드 러벤펠드, 데이빗 크로넨버그 두 남자의 관점이 만들어낸 두 개의 다른 프로이트와 융은 너무 흥미로웠다. 평소 성욕을 바탕으로 한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이론에 긍정할 때가 많다가도 모든 문제에 성욕이 기반하고 있다는 대목에서는 오히려 신비주의와 샤머니즘에도 천착하는 융의 철학적 세계가 나와 더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드 러벤펠드, 데이빗 크로넨버그 두 사람의 작품을 접한 뒤 프로이트와 융의 책을 한번 더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