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서

다카노 가즈아키, 제노사이드

guno 2012. 10. 29. 18:37

 

 

진아가 책을 보내왔다. 재밌는 책이 있으니 같이 읽자며. 무슨 책인가 했더니 다카노 가즈아키. <13계단>과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는 단편집으로 알고 있던 작가다. 근데 또 황금가지? 그는 황금가지와 출판계약을 맺은 건가. 황금가지야 매우 인상이 좋은 출판사다. 온라인작가였던 이영도를 메이저로 데뷔시킨 곳이라고 알고 있고, 지금도 재밌는 책을 잔뜩 출판하고 있으니까. '밀리언셀러클럽'이라고 해서 전세계 추리호러소설들을 시리즈로 묶어내더니 다카노 가즈아키와 인연이 잘 닿았나보다. 좋은 출판사와 실력있는 작가의 만남이니 보기 좋다.

몇년 전만 해도 일본 추리소설은 마니아들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는데 최근 2~3년 사이에 엄청난 시장 규모로 대중화되었다. 덕분에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게다가 이 출판사 저 출판사를 전전하며 자기 색깔을 찾지 못하던 작가들이 궁합 맞는 짝을 찾아 자리를 잡은 것도 보기가 좋다. 미유키 여사는 북스피어란 곳과 꾸준히 책을 내며 풍속추리소설의 대가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한 것으로 보인다. 장정도 번역도 엉망인 초기 작품에 비해 최근 책들은 번역도 잘 되어 있고 가볍고 예쁠 뿐 아니라 멀리서 봐도 그녀의 책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시마타 소지는 시공사와 꾸준히 책을 내는 것 같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현대문학과 연이 닿은 것 같지만 은근 이곳저곳을 두루 돌아보고 있는 것 같고.. 그러고보니 대형출판사들이 서로 앞다투어 일본 추리소설을 내놓고 있는 실정인데, 그럴만도 하다. 일본 추리소설은 다른 해외 추리소설과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와 너무 비슷하고 또 너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게다가 완성도가 매우 높아서 빠져들 수밖에 없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그가 2001년 <13계단>이란 책으로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며 데뷔했을때 심사위원이었던 미유키 여사가 하도 극찬을 하여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에 출간, 그해에 바로 읽었는데 그리 인상깊진 않았던것 같다. 작가 중에는 미유키 여사처럼 타고난 이야기꾼이 있다. 물론 탄탄한 취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취재한 내용은 기초가 되고 그녀의 상상력이 벽이 되고 기둥이 되고 문이 되고 지붕이 되는 작가. 이에 반해 다카노 가즈아키처럼 엄청난 취재량을 바탕으로 집을 지어 놓은 뒤 자신의 생각은 창을 내고 문을 내는 데만 사용하는 작가가 있다. <13계단>이란 책을 읽으며 이런 걸 다 어떻게 취재한 거냐 싶었고, 일본의 수형시스템이 생각보다 너무 올드하고 관료적이라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저자가 고발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한 책이었다. 낡고 보수적인 사회의 문제를 고발함과 동시에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도 뛰어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호흡이 너무 지루하단 생각을 했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책을 덮으면서 '이 사람 재밌는 사람은 아니네' 했던 기억은 난다. 그런 다카노 가즈아키를 오랜만에 조우하게 된 것이다. 진아가 재밌게 읽었다니 호기심도 생겼다. 

 

 

역시 이 사람은 엄청난 취재를 바탕으로 내용을 설계하는 걸 무척 좋아하는구나 싶다. 백악관을 중심으로 한 미국 정가를 배경으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다양한 자료와 근거를 통해 비판하고 있는데, 전쟁사업으로 돈을 벌고 있는 군수업체와 군부, 정치권의 타락한 관계를 꼬집으려나 했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인간의 본성을 얘기한다. 불안한 정신세계를 가진 지도자가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되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위험성. 트라우마로 가득한 미국 대통령 한 사람이 죽일 수 있는 인류의 규모에 대해서. 그리고 당장 눈앞에서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먼 곳에서 원격조정으로 살육이 진행될 경우 인간이 얼마나 폭력에 둔감해질 수 있는지, 최신 병기라는 테크놀로지가 물리적 거리를 떨어뜨려놓음으로써 한사람 한사람의 병사가 말살할 수 있는 인류의 규모는 상상을 벗어났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뽑은 권력자, 대통령과 정치인들이라는 것. 그들은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지구의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전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인간성 또한 조작하길 서슴지 않는다. 병사로 사육된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새 전쟁에 적합한 인간으로 조건화 되어 세계 곳곳에서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가 일어난다. 이 모든 것을 집단 이전의 인간, 현생 인류의 본성과 한계에서 찾는다는 점이 새롭다. 

여기까지가 그가 세운 책의 얼개. 그리고 여기에 초인류가 등장한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의 지성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초인류의 등장은 지구에서 가장 힘센 종족이라 자부하던 인간들을 침팬지처럼 느끼게 할 만한 우월함으로 공포를 자아낸다. 백악관은 자신들이 제어할 수 없는 초인류의 암살을 계획하고, 암살계획의 입안자가 된 루벤스는 이제 세살이 된 초인류 아이에게 그리스어로 초월적인 지성을 의미하는 누스(NOUS)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누스를 암살하는 작전은 그리스신화 속 여신의 이름을 빌려 '네메시스'로 정한다. 민족말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콩고의 밀림에서 네메시스 작전을 실행하는 네명의 병사와 누스를 구출하려는 인류학자 피어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스의 탈출계획에 동참하게된 일본의 약학전공 대학원생 겐토와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모니터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힘의 원리를 맹신하는 인류에게 도저히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초인류의 등장은 지금까지의 오만을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68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 호흡이 끊기지 않고 한번에 읽힌다. 제노사이드, 2011년작,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 그러고보니 <13계단>으로 등단한지 딱 10년, 이 책은 10년차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작가, 그동안 많이 재미있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