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_ 바틀로켓 + 다즐링 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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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미국 출생.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립학교를 다니며 남부러울것 없이 자랐지만 어려서 부모님의 이혼을 겪고 생각많은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웨스 앤더슨 감독. 형제들과 함께 8mm 영화를 만드는 걸 즐겼다는 이 남자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극본을 공부했다. 룸메이트였던 오웬 윌슨과 공동으로 극본을 써서 만든 첫 단편영화가 범죄 코미디 <바틀 로켓>. 엉뚱한 캐릭터들과 건조한 유머, 왠지 슬픈 코미디는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시니컬하지만 그게 또 완전한 냉소는 아닌, 데면데면한 관계를 한꺼풀 벗기면 순수한 욕망과 따뜻한 피가 꿀럭꿀럭 흐르고 있다. 가족의 결핍, 이혼, 형제, 우정, 아웃사이더, 딱총, 해양생물, 도서관, 라틴어, 포크송, 라디오, 벌레, 연극, 이발소, 캠핑 등은 그의 영화에 즐겨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고 감독 자신이 경험하고 추억하는 타임캡슐이기도 하다. 웨스 앤더슨은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춘채 자꾸만 과거로 되돌아가 그때를 몇번이고 다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의 영화는 전부 어려서의 트라우마를 극복해가는 감독 자신의 성장영화다, 라고 하지만 나에게 그는 또 다른 형태의 팀 버튼같은. 어른이 되길 거부하거나 혹은 어른이 되지 못하는 두 남자의 영화를 보면 툭툭, 누군가 나를 쳐서 돌아봤는데 저 아래 키 작은 아이가 말간 얼굴로 나를 불러세운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지나치게 성숙한 아이들과 어린애처럼 유치하고 덜떨어진 어른들이 잔뜩 등장하는 그의 영화를 보며 나이에 비해 조숙한 아이였으나 지금은 철없는 어른으로 늙어가는 중인 내 자신이 잘못된 부속은 아닌것 같아 왠지 위로가 된달까. 내 친구가 해주는 이야기 같아서 나는 그의 영화가 좋다. 종종 영화에 인용되는 문학의 넓이로 보건데 청소년기, 그의 흑역사 속에서 도서관 죽돌이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왠지 애정이 간다.
그리고 또하나, 웨스 앤더슨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탐미주의라 불릴만큼 아름다운 장면의 연출이다. 그는 정확하게 의도된 앵글, 화면디자인, 의상, 무대미술, 영화음악, 하다못해 자막 서체에까지 감독의 취향을 반영할만큼 완벽주의자로 알려져있다. 한 장면을 100번씩 찍었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뒤를 잇는 결벽주의자로 꼽힐 정도다. 강박적인 컨트롤러라 비난받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를 즐기는 관객에게는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무얼 말하고 보여주고 싶어하는지가 너무도 분명해서 그저 좋은. 같은 배우 같은 스태프와 계속 일하길 즐긴다는 감독답게 똑같은 배우들이 영화마다 다른 모습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걸 보는 것 또한 식상하지 않고 너무 재밌다면 애정이 지나친 걸까.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자신을 잇는 천재감독으로 꼽았다는 웨스 앤더슨, 만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 엉뚱하고 덜 자란 소년 감독의 재밌고 아름답고 판타스틱한 영화들.
【Chapter1】남자, 우정에 살다
■ 바틀 로켓 Bottle Rocket (1996년) ; 기행을 일삼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앤서니가 퇴원하는 날, 담당의사가 그의 퇴원을 돕고자 병실에 들어왔는데 앤서니의 침대보가 창문 밖으로 묶여져 있다. 의아해하는 의사에게 앤서니가 말한다. 자신의 친구 디그난이 정신병원 같은 데서 쉽게 퇴원을 시켜줄리 없다며 탈출 계획을 세웠으니 그냥 이렇게 창문으로 퇴원하면 안되겠냐고. 친구를 실망시키고 싶지않다는 앤서니. 의사가 창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나무 아래 망원경과 깨진 거울조각을 들고 호들갑스럽게 움직이는 친구가 보인다. 의사가 그러라고 하자 침대보를 타고 창문 밖으로 퇴원한 앤서니는 오랜만에 절친 디그난과 반갑게 상봉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디그난이 앤서니에게 노트를 건넨다. 친구가 없는 6개월동안 디그난이 심혈을 기울여 세웠다는 인생설계는 도둑이 되는 것이다. <행복과 부를 얻기 위한 75개년 계획>. 노트에는 색색깔의 싸인펜으로 멋진 인생을 살기 위해 나아갈 방향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이를 위해 디그난은 실력있는 절도조직과 안면을 터놓았다. 앤서니가 숙련되면 디그난과 함께 조직에 들어가 평생 멋진 도둑으로 살 계획이다.
연습삼아 가정집에 침입해 물건을 훔친 앤서니와 디그난. 훔친 물건의 내역을 확인하다 아차, 디그난이 귀걸이를 언급하자 앤서니의 안색이 변한다. "야, 그건 내가 엄마 생신선물로 드린 건데 그걸 훔치면 어떡해." 그들이 턴 가정집은 앤서니의 집이었던 거다. 귀걸이를 돌려놓기 위해 여동생의 학교에 찾아간 앤서니. 여동생의 친구가 대뜸 파일럿이 맞냐고 묻는다. 앤서니가 동생에게 왜 거짓말을 했냐고 하자 그럼 미친짓 하다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고 하면 좋겠냐는 동생. 오빠는 정신적으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치료를 받은 것 뿐이라고 하자 평생 일한 적 없는 네가 뭐땜에 지치냐고 따박따박 되묻는 여동생. 귀걸이를 엄마 몰래 보석상자에 넣어달라고 부탁하자 동생이 집에 돌아와 직접 돌려놓으면 되지않냐고 묻는다. "난 이제 어른이야. 어른은 부모 집에서 살지않는 거야."
본격적으로 절도를 하려면 자동차가 필요하기에 부잣집 아들인 밥이 동료로 투입된다. 입이 쩍 벌어질만큼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지만 부모님은 늘 해외에 있고 모범생인 형제들은 그를 따돌려 할수없이 별채에 살고있는 밥. 부자일지 모르지만 뭐가 돼야할지 모르는 아이들은 이렇게 뭉쳐 삼총사가 된다. 총을 사서 총쏘는 연습도 하고 동네 마트를 털어 몇백 달러를 훔치기도 하지만 화려하고 드넓은 밥의 별채에서 얼마 안되는 돈을 나누며 좋아라하는 이들은 여전히 애들처름 보인다. 훔친 돈으로 기껏 하는 짓도 폭죽을 사서 밤하늘에 지분거리는게 다다.
어찌어찌하여 디그난이 알아둔 전문절도조직과 결합한 세친구. 어느새 밥의 별채엔 무시무시한 형님들이 터를 잡고 제집인양 하는데 세친구는 벌써부터 범죄자가 된 기분에 으쓱으쓱하다. 허름한 수산물가공공장을 털기로 계획하는데 절도조직의 우두머리 헨리는 자립심을 키워야한다며 디그난에게 자기는 빠질테니 친구들과 한번 해보라고 한다. 이때쯤 한번 의심해볼만도 한데 선뜻 그러겠다고 다짐하는 디그난. 세친구가 공장을 털다가 그조차 실패하고 디그난은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그사이 헨리의 조직은 밥의 집을 말끔하게 털고 사라진다. 교도소에 있는 디그난을 방문한 앤서니와 밥. 여전히 아이같은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돌아서는 디그난의 얼굴이 슬로우모션으로 잡힌다. 쓸쓸하게. 이 장면 때문에 세친구가 어리석은 청춘의 방황을 끝내고 어른으로 성장하는 영화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수긍하지 못하겠다. 이 영화 어디에서 방황이 끝났다는건지.. 이들은 어른이 되지 않았다. 아니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 기대했던 범죄에 실패했으므로 어른이 되지 못했다. 디그난과 친구들은 의욕적으로 쏘아올렸으나 불발된 바틀 로켓을 경험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이 아쉬움이 교훈과 깨달음, 성장의 발판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영화속 헨리의 말처럼 누구나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몽상가도 필요하다.
■ 다즐링 주식회사 The Darjeeling Limited (2007년) ; 서로 떨어져 살던 삼형제가 인도에서 뭉쳤다. 맏형 프랜시스의 제안으로 인도여행기차 '다즐링 주식회사'에 탑승한 삼형제. 참고로 인도에는 사막, 궁전, 힌두성지 등의 테마여행 전세기차가 성업중이며 '다즐링 주식회사'도 그중 하나다. 객실방 40/41에서 해후한 세사람. 맏형 프랜시스는 어디서 사고를 당했는지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나타났다. 둘째 피터는 이혼을 준비하다 아내의 임신사실을 알고 심란한 마음에 떠나왔으며 막내 잭은 여자친구와 헤어졌지만 마음을 정리하지 못해 괴로워하다 여행에 합류했다. 그들이 대체 뭐하는 족속들인지 정체를 가늠할만한 정보는 없다. 그냥 그들은 철없는 형제일뿐이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준 여행가방을 들고 아버지의 안경을 쓰고 아버지의 면도기를 사용하며 함께 여행중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기차가 멈추고 들르는 인도의 곳곳은 아름다울 뿐이고 형제들은 그 와중에 싸우고 투덜거리며 인도를 지나간다.
혼자 여행을 자주 다녔다. 여행을 떠나면 현실의 문제나 고민을 훌훌 털어버리고 단번에 기분전환을 해서 돌아올 것 같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낯설고 멋진 곳을 여행해도 떠나온 곳에서의 문제는 그리 쉽게 떨쳐낼수 있는게 아니다. 여행하는 내내 서울의 어느 한 곳, 나와 관련된 사람들과 문제들을 묵직한 보따리처럼 머리에 이고 다닌다. 힘들게 산을 오르는데 푸른 나무숲이 사무실로 변해서 나도모르게 전화를 걸기도 하고, 파도치는 해변가에 혼자 앉았다가 어느순간 애인과 죽도록 싸우는 나를 발견한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냥 두면 여행을 떠났을지언정 나를 둘러싼 공기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행의 묘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문을 발칵 열어젖히듯이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무엇과 만난다는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쌩쌩부는 산의 정상일 수도 있고, 물한잔 얻어먹자고 들어간 집에서 밥을 차려주겠다고 하시는 할머니를 만난 순간일 수도 있다. 내가 이 곳에 있으려고, 이 사람과 만나려고 떠나왔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리에 이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놓고 그제야 나는 여행자가 되어 떠나왔음을 즐기게 된다.
너무나 아름다운 인도의 곳곳을 찾아가지만 형제들의 머릿속은 복잡하고 그들은 손 안의 장난감밖에 볼줄 모르는 아이들처럼 무심하게 인도를 지난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은 엉뚱한 세남자 땜에 웃기도 하고 감독이 제대로 보여주는 인도의 곳곳을 즐기며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뭔가 숨기던 프랜시스가 사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엄마를 만나는 거라고 고백한다.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장례식을 치루던 날, 커다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던 형제에게 더욱 청천벽력같은 소식은 여행중이라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다는 엄마의 전화였다. 그리고 1년, 그동안 프랜시스는 엄마의 행방을 찾아나섰고, 히말라야의 어느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아마도 슬픔 때문에 이상해진 것이 분명하므로 엄마를 구해와야 한다는 프랜시스. 그러나 아들 일행이 찾아간다는 연락을 받고 엄마의 메일이 도착한다. 식인호랑이가 나타나 동네가 어수선하니 내년에 오렴. 말도 안되는 거짓말! 엄마는 우리가 보고싶지 않은 거야. 우리를 엄마 인생에서 떼어내려고 하는 거야. 도대체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젠장!!! 그러나 여행을 접고 돌아가려는 형제에게 문을 열어젖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눈앞에서 목격한 인도소년의 안타까운 죽음과 슬픈 장례식. 말한마디 안 통하는 인도의 외진 마을에서 슬픔으로 공감하고 마음을 나눈 형제는 계획을 바꿔 다시 엄마를 찾아간다. 히말라야의 산꼭대기 마을에서 만난 엄마는 놀라지만 반갑게 아들들을 맞이한다. 물론 식인호랑이가 있다는 엄마의 말은 사실로 판명된다. 왜 장례식에 오지 않으신 거에요? 가기 싫었어. 아빠의 죽음이 슬프지 않으세요? 충분히 슬프고 가슴이 아파. 아빠를 사랑하지 않으세요? 너무나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거야. 사랑한다면 장례식에는 참석했어야죠. 마음이 통하는한 우리는 함께 있는 거란다. 나는 너희와 함께 슬퍼하며 그를 보냈는걸. 우리는 아빠를 보내지 못했어요. 찬찬히 아들들을 바라보던 엄마가 한가지 제안을 한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말을 하면 우리는 훨씬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단다. 말없이 네사람이 서로를 마주본다. 인도소년, 다즐링 주식회사, 피터 아내, 잭 여친, 식인호랑이 등등 네사람의 이야기가 칙칙폭폭 기차칸에 담겨 흘러간다. 아들들의 머리에 굳나잇 키스를 하고 돌아서며 엄마가 말한다. "(그게 뭐든)계속될거야". 다음날 아침 엄마는 또다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지만 엄마가 차려놓은 아침밥상은 따뜻하다. 세형제가 돌아가는 기차역, 저 앞에 이미 출발한 기차를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뛰어가던 형제들이 무거운 아버지의 여행가방을 던져버리고 가볍게 기차에 올라탄다. 우리의 마음이 통하는한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공감할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함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