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
초등학교 1학년 미술시간이었다.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린 뒤 물감으로 채색하는 걸 처음으로 배웠다. 크레용이 지나간 자리에는 물감이 발라지지 않는 걸 보고 마술같다고 생각했다. 우와 하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간단한 그림으로 우리들을 놀래킨 선생님은 이제 각자 스케치북을 가득 채울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선생님이 예를 들어 보여준 그림은 바닷속이었다. 푸른 물결속에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있는 그림을 보여주셨고, 아이들은 머리를 쓴다해도 아직 어려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선생님의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렸다. 간혹 물고기 한마리를 여러 색깔의 크레용으로 칠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따로 미술수업을 받은 아이가 적었던 때라 조금씩 달라도 거의다 비슷한 그림이었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내 짝꿍은 달랐다. 학기초부터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던 내 짝꿍은 매우 동글동글하게 생겨서 말을 무척 유창하게 하는 아이였는데, 그 아이는 바닷속을 온통 빨간색 크레용으로 그렸다. 물결도 물고기도 해초도 모두 빨간색 크레용으로 그렸다. 크레용으로 테두리만 그리는게 아니라 어느 곳은 채색까지 해놓고는 그 위에 다시 빨간색 물감을 칠했다. 어느 곳은 흐리게, 어느 곳은 아주 진하게. 하얀 스케치북이 온통 빨간색으로 칠해졌는데, 놀랍게도 그애의 새빨간 바다는 어린 눈에도 아주 아름다웠다. 다른 아이들은 쟤좀 보래요~ 하며 놀리기도 했지만, 분명 그애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아이들이 많았지만 내 눈엔 그애의 바다가 최고로 보였다. 내가 왜냐고 물었었는데 그애의 대답은 이랬다. 난 빨간색이 좋거든. 말 많은 똑똑이였다가 어느순간 아주 무뚝뚝해지는 그애의 불안한 태도가 맘에 들었었는데 말도 없이 전학을 가버렸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왔는데 그애가 전학을 갔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섭섭했던 기억이 난다.
남들과 다른 사람, 왠지 불안해서 자꾸 눈길이 가는 사람을 좋아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읽었던게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정의감에 불타지만 소심하고 우울하며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존감을 내세우지만 다른 한편 매우 불안하고 불행한 그의 인물들에게 푹 빠졌었다. 어찌나 생각이 수다스러운지 머릿속으로는 별의별 생각을 다하는 주제에 현실에서는 실수투성이, 무례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 이를 갈고 복수를 꿈꾸지만 매번 헛발질, 나름 까다로운 눈매를 가졌다 자부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건 늘 허영심에 가득한 여자들이고 그래서 결국 언제나 순정을 짓밟히는 주인공들. 바위로 달려드는 달걀처럼 무모하다싶을 만큼 현실에 대항하고 이 세상에 판타지는 없다는 걸 깨우치려는듯 매 도전마다 실패하고 깨져서 피를 철철 흘리는 사람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성찰에 도달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과 함께 나는 사춘기를 보냈다. 사모바르에 끓인 물을 나눠 마시며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photo by Desiree Dolron
요즘의 나로 말하면 다시 사춘기를 겪고 있는데 때늦은 나의 두번째 사춘기를 함께 하고 있는건 에드거 앨런 포다. 아가사 크리스티를 읽다가 조그만게 발랑 까져서 저질스런 책을 읽고 있다고 사촌오빠에게 혼났던게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니까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했던거 같다. (당시 내가 읽고 있던 건 아가사 크리스티의 『끝없는 밤』이었는데, 모범생으로 유명했던 고등학생 사촌오빠는 과연 책 제목 때문에 오해를 해서 저질책이라고 한 것인지, 아니면 추리소설 나부랭이를 비하한 것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른들이 있는 자리에서 된통 혼났던 나는 이 기억이 꽤 선명하게 남았다.) 한번 꽂히면 웬만해서 종목을 바꾸지 않는 나답게 당시 나는 동네서점의 추리소설 코너를 오랫동안 맴돌았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에드거 앨런 포의 대표작도 몇권 읽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도 내게 재밌는 작가가 아니었다.
여름 즈음에 우연히 단편집을 손에 쥐게 되었는데 머리에서 종이 울렸다. 내가 왜 지금까지 이 사람을 몰라봤을까 싶다. 이토록 우울하고 불안하며 음침한 인간이라니. 시체를 벽속에 매장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자신의 여동생을 산채로 매장하는 오빠, 매일밤 지하에서 동생이 관을 긁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공포에 휩싸이는 어셔가의 이야기 같은 것만 봐도 에드거 앨런 포가 심상치 않은 작가임을 알아봤어야 했는데. 12살 때부터 알아온 이 사람에게 나는 올해 홀딱 반해버렸다. 그가 이끄는 으스스한 정신세계는 매력적인 동시에 매우 불안해서 이러다 죽을수도 있겠다 싶을만큼 아슬아슬했다. 시뻘건 핏빛,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부딪치며 죽고 죽이는 게 아니라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에드거 앨런 포는 핏빛 바다에 빠져 온몸에 피칠갑을 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저기 검은 물밑에 무엇이 있어! 저 벽에서 소리가 들려! 이 공기중에 무언가가 내 목을 조르는것 같아!!! 귀청을 찢을듯한 그의 비명과 횡설수설을 읽으며 인내심이 바닥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참고 조용히 그를 읽다보면 그가 보인다. 두려움에 떨며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그가. 가지말라고 소리쳐 부르면 그가 대답할것 같다. 내가 두려운게 뭔지 봐야겠어. 할수 없다는듯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은 지독하게 슬픈 느낌이다.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건 세상 무엇보다 바로 자신, 어디선가 벽에 부딪치고 공명해야할 생각들이 어디에도 닿지 못해 마구 뻗어나가 결국 생각의 바다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그런 자신이 아니었을까. 스스로 망상의 연속, 환상적인 공포의 압박이라고 칭한 우울하고 불안한 날들이 그를 얼마나 다르게 했는지, 고통스럽게 했는지 알것 같았다.
에머슨, 롱펠로, 호손 등 뉴잉글랜드 출신의 동시대 작가들이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순탄하게 작가생활을 시작한 것과 달리 오랜 가난에 시달리며 튀는 말과 행동으로 문단의 멸시를 받아온 에드거 앨런 포는 기나긴 외로움을 겪은 뒤 첫사랑과 재회, 그녀와의 행복한 결혼을 약속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불명으로 쓰러진채 길거리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며칠 뒤 1849년 10월 7일 일요일 아침 5시, 40살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photo by Anne Arden McDonald
『병속에 발견된 원고』
물리학에 심취한 현실주의자, 어떤 현상이든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미신이라는 도깨비불에 미혹되어 진리의 영역을 벗어날리 없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한 남자가 배를 타고 가다가 엄청난 소용돌이를 만나 난파한다. 그런데 부서져 침몰을 앞둔 배 앞에 마찬가지로 소용돌이에 휘말린 유령선이 나타난다. 모든 선원이 죽고 홀로 유령선에 올라탄 남자.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내 영혼을 사로잡고 있다. 그 감정은 분석을 허용하지 않으며, 지난 세월 동안 배워 온 교훈도 그것을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미래에도 그것을 이해할 열쇠를 손에 넣지 못할 것 같다. …새로운 감각, 그러니까 새로운 개체가 내 영혼에 보태진 셈이다.” 그는 누구도 믿지 못할 이 상황을 일기로 쓰기 시작한다.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병에 담아 바다에 던지리라 생각하면서.
멈추지 않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갇혀서 침몰하지도 탈출하지도 못하는 유령선. 유령들은 남자를 보지 못한다.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희망의 열렬함을 가지고 너무나 부지런히. 남자의 존재는 유령들에게 그저 보이지 않는 유령일 뿐이다.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유령들을 관찰하던 어느 날 소용돌이의 원이 급속도로 작아진다. 추락한다.
『리지아』
“아, 무의미한 언어여! 우리가 영적인 사실들에 대해 너무도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우리는 다양하긴 해도 실제로는 단순한 소리일 뿐인 언어 뒤에 숨는다. 리지아의 눈에 깃든 표정! 내가 그것에 대해 심사숙고하느라 얼마나 오랜 시간을 소모했던가! 그 의미를 캐묻기 위해 한여름 밤을 얼마나 자주 지새웠던가! 내 사랑하던 연인의 눈동자 안 깊숙이 놓여있던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남다른 학식과 단정한 미모로 남자를 사로잡았던 아내가 죽어가고 있다. 흑단 같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리지아. 그녀는 친구이자 동료이고 스승이며 연인이었다. 매일매일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리지아가 어느날 밤 시를 지었다며 남자에게 읽어달라고 한다.
보라! 지금은 잔치의 밤,
외로운 마지막 해의 하룻밤!
날개가 달린, 그리고 베일을 쓴
눈물 젖은 천사의 무리들이
극장에 앉아서 보고 있다.
희망과 공포의 연극을,
...
무언극 배우들, 저 높은 곳 하느님의 모습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댄다.
그리고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콘도르의 날개를 퍼덕여
...
보이지 않는 존재, 워이!
...
그러나 보라, 광대극 속 군중 한가운데로
한 형체가 끼어들어 슬금슬금 기어가고 있다!
무대 배경 속 고독으로부터 몸부림치며
빠져나온 핏빛 물체!
몸부림친다! 몸부림친다! 치명적인 독니를 박는다.
무언극 배우들이 그 먹이가 된다.
...
꺼진다- 불이 꺼진다- 모든 불이 꺼진다!
그리고 덜덜 떠는 모든 형체 위로
질풍노도와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커튼이, 관을 덮는 보가.
그러자 창백하고 핏기 없는 표정의 천사들이 모두
치솟아 오르며 베일을 벗는다.
그리고 그 극이 「인간」이라는 제목의 비극이며,
그 극의 주인공은 벌레, 정복자임을 확인한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아내의 시를 읽고 슬픔에 잠기는 남자. 그러나 결국 리지아는 숨을 거두고 아내를 잃은 남자는 그녀가 남긴 막대한 유산을 가지고 외딴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새삶을 시작한다. 젊고 아름다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로웨나와 결혼도 한다. 젊은 아내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한편 재산을 보고 자신과 결혼한 아름다운 아내를 혐오하는 남자. 그럴수록 죽은 리지아는 남자의 마음속에 재단을 세우고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던 어느날 젊은 아내가 열병에 걸린다. 방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는 알 수 없는 말만 계속하는 아내. 의사들조차 원인을 알 수 없어 치료가 어렵다고 한다. 그제서야 아내가 안쓰러운 남자. 방안엔 아무도 없으니 마음을 편히 먹고 기운을 내라고 위로하던 어느날, 남자 또한 보이지는 않지만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존재를 느낀다. 하지만 아픈 아내에게 자신도 무언가를 보고 느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국 젊은 아내는 공포에 휩싸여 헛소리를 계속하다가 덧없이 죽고, 장례를 준비하던 남자는 수의를 입고 침대에 누운 아내의 시체와 단둘이 방에 남는다. 상심에 빠진 남자는 슬픔에 지쳐 잠들었는데 어둔 밤, 울음소리와 같은 숨소리가 남자를 깨운다. 화들짝 놀라는 남자. 자세히 보니 숨소리와 함께 얼굴을 가린 수의가 움직인다.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뛰는게 느껴진다. 어찌된 걸까. 오랫동안 아파온 사람을 상대로 너무 급히 장례를 준비했던 걸까. 아내가 살아났다. 남자는 놀라서 말을 잃고 있는데 수의를 입은 아내는 몽유병자처럼 일어나 방을 걷기 시작한다. 그가 급히 손을 내밀어 아내를 부축하자 머리를 감싼 수의가 벗겨진다. 흑단같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의 리지아가 그곳에 서있다.
"... 그리고 죽음을 거부하는 의지가 그곳에 있다. 의지와 그것이 지닌 활력의 신비를 아는가? 신이란 집중된 의도로 모든 존재에 스며드는 거대한 의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연약한 의지라는 단점만 지니지 않았더라면 천사에게도 죽음에게도 완전히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셔가의 몰락』
남자는 어린시절 단짝친구였던 어셔의 초대를 받고 저택을 방문한다. “그 집을 바라보았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아편의 효과가 다하면서 꿈에서 깨어난 아편 애호가가 느낄 법한 감정, 그러니까 환각 상태에 있다가 갑자기 일상으로 내팽개쳐지면서 오는 씁쓸한 감정, 혹은 얼굴을 가린 베일이 벗겨져나갔을 때 느껴지는 섬뜩한 감정에나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저택은 멀리서 보면 고풍스럽고 견고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곰팡이와 거미줄이 가득하고 금방이라도 바스라질것 같은 벽돌벽에는 보일듯말듯한 금이 지붕에서부터 지그재그로 내려와 저택을 둘러싼 호수의 깊은 물속으로 이어졌다. 살고있는 곳의 성격이 그곳에 사는 사람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때 그것은 고색창연한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
남자는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친구의 뜬금없는 초대에 당황했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깊은 어셔 가문에 대한 기대와 그 오랜 시간 외부인과의 접촉없이 한집안 식구들끼리의 결혼으로 혈통을 유지해온 어셔가 사람들의 특이한 성질, 독특한 감수성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초대를 수락했다. 웅장하지만 낡고 닳은 저택에 들어서자 슬픔으로 가득찬 공기가 느껴졌다. 어셔는 남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못본 사이에 인상이 확 바뀔 정도로 변해버린 어셔는 자신이 가족력에 기인한 신경병을 앓고 있다고 말한다. 그 병의 증상으로 말하면 병적으로 예민한 감각인데, 그로 인해 풍미가 없는 음식만 겨우 먹을 수 있고 특정한 천으로 만들어진 옷만 겨우 걸칠 수 있으며 눈이 부셔서 낮에는 외출도 못하고 집안에서는 모든 창문에 커튼을 쳐야 하며 꽃향기에도 숨이 막혀 모든 냄새나고 자극적인 것들을 피하고 있다는 것. 또한 벌레가 날아다니는 아주 작은 소리까지 들리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놀랄 때가 많다고. 각양각색의 비정상적인 공포를 나열하던 친구가 말한다. “신체적 위험에 대해서는 겁이 안 나. 하지만 신체적 위험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공포심이 겁나.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 무시무시한 유령과도 같은 공포에 생명과 이성의 자리를 내어줄 날이 올 것 같아 난 너무 두려워.”
어셔의 여동생 매들라인 또한 오랜 중환을 앓고 있었는데 그녀가 죽으면 어셔는 자신이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가 될 것이라는 데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병든 자신, 죽어가는 동생, 그리고 마찬가지로 죽음의 공기를 내포한 오래된 저택에 살면서 어셔는 마지막 수단으로 친구를 초대해 위안을 청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 남자가 도착한 그날, 어셔의 여동생은 숨을 거둔다. 그녀의 관은 가족묘지에 매장하기 전 지하 납골당에 모셔졌다. (당시에는 젊은 여인의 무덤을 파내어 시체를 훼손하는 일이 종종 있어서 납골당에 보관했다가 시체가 썩은 뒤 매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어셔의 병색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친구의 미신과 공포심은 어느새 남자에게도 전염이 됐다.
푹풍우치는 밤, 몸살을 앓듯 오래된 저택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와 불안감이 남자를 덮쳤다.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에게 어셔가 찾아온다. 광기로 번뜩이는 친구에게 차마 자신의 불안감을 보여줄 수 없었던 남자는 잠도 오지 않는데 책이나 읽자며 그를 소파에 앉히고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한다. 책을 읽는 중에도 집안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남자는 최대한 무시하려 애쓰며 친구에게 책을 읽어준다. 그럼에도 계속되던 소리가 쿵, 하고 커다란 소음을 낸 뒤 잠잠해진다. 너무 놀라 책을 덮고 친구에게 다가가 괜찮은지 묻자 어셔가 말한다. “너도 이젠 들리지? 난 사실 처음부터 들렸어. 하지만 감히 말할 수 없었지. 우리가 그애를 산채로 관에 넣었다는 걸. 그애가 관속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어. 그애의 심장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무겁게 뛰는 소리가 들였어. 그런데 감히 말할 수 없었어. 그애가 내 성급함을 탓하려고 이리 달려올까봐 무서워서. 그리고 이제 그애가 여기까지 왔어!” 그순간 그가 가리킨 문이 검은 아가리를 벌리듯 열리고 거기에 수의를 입은 매들라인이 우뚝 서있다. 못 박힌 관을 탈출하기 위해 몸무림을 친듯 싸움의 흔적이 역력한 그녀의 수의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며 어셔에게 다가와 의자에 앉은 그의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공포에 휩싸여 눈을 뜬채 죽어버린 어셔 위로 피묻은 수의를 입고 쓰러진 매들라인. 남자는 혼비백산해서 방을 나와 저택에서 탈출한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뒤돌아본 어셔가의 저택은 푹풍우 속에서 금이 가며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순간 저택을 삼킨 깊고 축축한 호수는 조용히 입을 다문다.
『윌리엄 윌슨』
남자는 타락한 자신으로 인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잊지못할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본명을 밝힐 수 없으며 그러니 지금부터 자신을 윌리엄 윌슨이라 부르기로 한다. 자신의 타락은 순전히 환경에서 비롯되었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서서히 타락해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망토를 벗듯 그가 가진 모든 장점을 한순간에 벗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죽음을 앞둔 남자는 자신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뒤를 돌아보려 한다. 동료 인간들의 공감- 하마터면 동정심이라고 할 뻔했다- 을 자아낼 수 있길 바라면서.
나의 타락은 산 정상에 위치한 감옥처럼 거대한 규모의 기숙학교에서 시작됐다. 모르타르를 이용해 깨진 유리를 박아넣은 튼튼한 벽돌담이 에워싼 오래된 저택은 예배와 산보 시에만 개방되는 엄격한 종교학교였고, 코담배 냄새를 풍기며 성난 표정으로 매를 들고 다니던 교장이 주말이면 목사가 되어 성직자의 옷을 입고 가발을 쓴채 인자한 설교를 늘어놓는 곳이었다. 정열적이며 오만한 성격으로 인해 또래들의 대장으로 군림하던 그 시절, 그중 한 친구만이 나와 거리를 두었다. 나와 같은 이름과 성을 가진 아이. 생년월일이 같고 같은 날 입학했으며 체격까지 비슷한 그 아이만이 수업시간이나 체육시간, 혹은 운동장에서의 다툼에서 감히 나와 경쟁하고 나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믿거나 복종하지 않으며 어떤 일에 대해서든 멋대로 호령하지 못하게 훼방을 놓았다. 또한 나의 보호자라도 되는양 행동하며 자주 내 의지에 반대해 주제넘게 참견했다. 별볼일 없어 보이는 그 아이의 반역은 무시하려 해도 사실은 두려운 무엇이었다. 그 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나와 동등하게 군다는게 사실 그가 진정 나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따르는 다른 아이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 아이의 경쟁과 저항, 그리고 주제넘고 끈덕진 훼방은 매우 은근하게 이뤄지고 있었고, 그 와중에 나를 향해 다정한 표정을 짓는 그 아이를 보면 나는 경이감과 동시에 굴욕감을 느꼈고 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 경쟁하지만 우리 둘은 많은 면에서 비슷했고, 그래서 친근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의 상반된 입장만이 그런 친근감이 우정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아킬레스건을 가지지 않은 아이, 스스로 조롱의 대상이 되기를 철저히 거부하는 그 아이의 단 한가지 약점은 발성기관의 문제로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는 거였다. 나는 종종 그 아이를 괴롭히기 위해 그것을 놀리곤 했는데 그러면 그 아이는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고 들키기 싫어하는 나의 약점을 들춰내 흉내내는 것으로 보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의 조언은 미성숙한 그 시기에 종종 범할 수 있는 오류나 어리석음이 없었고 도덕적 감각에 대해서만큼은 나보다 훨씬 예리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오만한 행위에 대한 반감으로 엇나갔고, 우정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던 우리 사이는 더욱더 멀어졌다.
학교생활이 계속되면서 그 아이와 부딪칠 일이 적어졌는데 어느날 무작정 학교를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온 뒤로는 그와 만나지 못했다. 나는 몇개월 뒤 이튼에 입학했고 술과 카드에 빠져 난봉을 일삼던 어느날 기숙사에서 비밀스러운 술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밤늦게 하인이 들어와 손님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너무 취해서 휘청거리며 나가자 그때 내가 입고 있던 옷과 똑같은 옷을 입은 청년이 현관에 서있는게 보였다. 그는 황급히 다가와 “윌리엄 윌슨!”이라고 내 이름을 속삭였다. 독특하게 낮은 쇳소리에 실린 엄숙하고도 의미심장한 경고, 그 목소리는 저 먼곳에 있던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고 그는 미처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사라졌다. 내 일에 그렇듯 끈질기게 참견하고 넌지시 충고하며 나를 괴롭히는 그 독특한 인간의 정체, 동명이인 윌리엄 윌슨, 그는 누구인가. 그의 목적은 무엇인가. 오래 고민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곧 옥스퍼드에 입학했고, 허영심에 가득한 부모님으로부터 정기적인 수입을 보장받았다. 나는 사치에 탐닉했고 헤프게 낭비했다. 당시 카드 사기를 익힌 나는 친구들을 상대로 부정하게 돈을 땄고, 친구들은 부자이며 옥스퍼드 학생인 나의 카드 사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모두를 속이는데, 그리고 모두가 속을만큼 어리석다는 데서 우월감을 느끼던 내 눈에 벼락부자 출신의 젊은 귀족이 포착됐다. 내 솜씨를 발휘할 대상으로 안성맞춤인 그를 위해 몇번의 카드 자리를 마련해 이기는 기쁨을 선사해주었고, 드디어 계획이 무르익은 어느날, 엄청난 기세로 돈을 따서 젊은 귀족 친구를 절망에 빠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순간 기숙사 방문이 발칵 열리더니 예의 그가 나와 똑같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곤 무례를 용서하라는 말과 함께 내가 지금까지 행한 카드의 사기 수법을 모두의 앞에서 까발리는 것이었다. 할말을 마친 그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재빠르게 방을 나갔고, 방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친구들의 거친 손길이 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내 옷에 숨겨져 있던 속임수용 카드들을 찾아냈다. 친구들은 아무말없이 침착하게 행동함으로써 자신들의 조소를 표현했다. 그만 나가달라는 말과 함께 나는 그 방을 빠져나왔고 옥스퍼드를 떠났다.
그 뒤 여러해 동안 그의 행태는 같은 방식으로 계속됐다. 로마, 비엔나, 베를린, 모스크바에서도 반복되었다. 그의 추격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역병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옮겨다녔다. 그의 행동은 만일 내가 계획대로 밀고 나갔다면 남들에게 끔찍한 피해를 끼칠 수도 있는 행동을 좌절시키는 것일뿐 다른 목적은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권리를 침범하고 권위를 가로채는 걸 정당화할 순 없었다. 그런 목적이 있다고 해서 자결권이라는 천부적 권리를 빼앗을 면책권은 없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는 공포심으로 나는 완전히 무력감에 사로잡혔고, 그의 의지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고 자포자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흥청망청 술에 빠져 지내는 사이 마음이 다시 힘을 얻었다. 그래, 더 이상 그에게 굴복하지 않겠다, 그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겠다! 마침 로마의 카니발 기간이었다. 나는 공작의 가면무도회에 초대되었다. 전부터 눈여겨보았던 공작의 아름다운 부인이 어떤 의상을 입을지 미리 알아낸 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몰래 그녀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낮고도 지긋지긋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뒤돌아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나는 그를 질질 끌고 무도회장을 나와 작은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칼을 뽑으라 명령했다. 우리의 결투는 아주 짧았다. 나는 그를 힘으로 밀어붙여 벽에 세운 뒤 그의 가슴에 칼을 난폭하고 잔인하게 여러번 내리꽂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문으로 다가가 빗장을 걸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새 방안의 배치가 달라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서있던 자리에 커다란 거울이 달려있었다. 거울을 향해 다가가자 창백하게 질리고 피로 얼룩진 내 모습이 거울 저편에서 다가왔다. 그는 죽음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내 친구 윌리엄 윌슨이었다. 그는 더 이상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으니,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동안 나는 마치 나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네가 이겼고 내가 졌다. 하지만 지금부터 너 또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를 죽임으로써 네가 얼마나 철저하게 너 스스로를 살해한 것인지 똑똑히 보라.”
『군중속의 사람』
남자는 몇달째 병으로 고생하다 마침내 회복기에 접어들어 모처럼 해질녁 커피숍을 찾았다. 기분이 상쾌했고 행복감에 젖었다. 주변의 것들에 대해 차분한 흥미와 호기심을 느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런던의 저녁은 혼잡했고 창밖의 군중들은 커피숍 앞에서 교차하며 서둘러 지나갔다. 지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던 남자는 어느새 몰입하게 됐다. 그들의 옷차림과 태도, 걸음걸이, 생김새와 얼굴표정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귀족과 상인, 회사의 사무원과 변호인, 주식 매매업자, 도박꾼, 군인은 물론 누가 창녀이고 소매치기인지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이 되자 군중속에서 단정한 모습의 사람들은 줄어들고 시간이 늦어질수록 사람들의 분위기가 거칠어졌다. 가스등 불빛이 환해지면서 모든 것이 어둡고 더 화려해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에 예순 다섯이나 일흔 정도 되어보이는 노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남자는 그의 얼굴에서 뛰어난 지력과 조심성, 궁핍과 탐욕, 냉혹, 악의, 피에 굶주림, 의기양양, 희희낙락, 극단적 공포, 그리고 너무도 강렬한 절망, 절망 중에서도 최악의 절망을 읽을 수 있었다. “얼마나 사나운 역사가 저 사람의 가슴속에 기록되어 있을 것인가!” 남자는 저도 모르게 외투를 집어들고 노인을 따라나섰다. 그의 주의를 끌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뒤를 바짝 쫓았다. 자세히 보니 노인의 옷차림은 낡았을지언정 고급이었고, 구멍이 뚫린 외투주머니 사이로 단도의 끝이 비죽 나와있었다.
군중속을 헤치며 노인을 따라가던 남자는 사람들이 적은 곳에 다다르자 확연하게 변하는 노인을 발견했다. 갑자기 목적을 잃은 사람처럼 우왕좌왕하고 망설이는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뚜렷한 지향점이 없는듯 노인은 같은 길을 건너고 또 건넜다. 상황은 반복됐다.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는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 분명한 발걸음으로 서둘러 걸었던 노인이 사람이 없는 곳에 닿으면 우왕좌왕하며 어쩔줄 몰라했다. 밤이 깊어 길거리에 사람이 줄어들자 노인은 야시장으로 향했고, 남자 또한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노인을 따라갔다. 노인은 무언가를 찾는척 했지만 어느 가게에서도 가격을 묻지 않았고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밤이 깊어 야시장도 문을 닫으려하자 노인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길을 돌아 다시 중심가로 왔지만 사람은 적었다. 계속 길을 걷다 마침 극장에서 나오는 마지막 관객들과 마주쳤다. 인파의 한가운데 놓이자 노인은 그제야 머릿속 고뇌를 덜어낸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관객들은 금세 뿔뿔이 흩어졌고, 노인도 다시 불안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이 되었다. 노인은 런던의 변두리로 발길을 돌렸다. 빈곤과 범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곳의 거리에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노인은 다시 활력을 찾았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강렬한 불빛이 쏟아졌다. 밤늦게 운영되는 주점들이 거기 있었다. 그곳에선 화려한 불빛이 새어나왔고 문앞에는 술주정뱅이들이 바글바글했다. 노인은 그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주문도 하지 않고 사람으로 가득한 술집을 할일없이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무심한 시간은 흘러 어느새 새벽이 밝았고, 주점이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노인의 눈에서 절망보다도 더 강렬한 감정이 묻어났다. 노인은 결심한듯 주점을 빠져나와 런던의 중감가로 향했다. 두사람이 걸어가는 동안 아침이 되어 도시는 다시 인간적 활기로 들떠 있었다. 이렇게 남자의 노인 따라가기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노인은 어제와 다르지 않은 패턴으로 거리를 오갔고, 오후가 되자 남자는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결국 남자는 참지못하고 노인의 앞으로 가서 길을 막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지만 노인은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그를 피해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제서야 남자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지능이 뛰어난 흉악범일지 모르겠다. 그는 혼자이기를 거부한다. 그는 군중속의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마음은 읽히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아마도 신이 내려주는 가장 큰 자비중 하나일 것, 그는 자신을 읽히지 않기 위해 군중속으로 들어간다.”
『타원형 초상화』
남자는 시종과 함께 여행을 하던 중 상처를 입었다. 시종은 아픈 주인이 한뎃잠을 자지 않도록 근처에 있는 저택의 문을 황급히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리 두드려도 사람이 나오지 않는 그 저택은 비어있었다. 할수없이 무단으로 열고 들어간 저택은 음울하면서도 웅장하며 위압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저 잠깐 버려진 듯, 아주 최근에 비워진 듯한 저택에 들어선 두 사람은 되도록 폐가 되지 않으려고 부속건물인 듯한 작은 탑으로 향했고, 그 안에서도 가장 작고 소박해 보이는 방에 짐을 풀었다. 집주인의 고급스런 취향을 대변하듯 작은 방에는 벽면 가득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각양각색의 트로피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침대맡에는 그림들을 설명하는 책자도 한권 놓여있었다.
오랜 여행에 지친 남자는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고, 시종은 바닥에 잠들었다. 깜빡 잠들었다 깬 남자는 무료함을 달래려고 침대맡의 책자를 펼쳐들었다.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고 책자의 설명을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한참이 지나 글자가 더 잘 보이게끔 촛대를 옮기려는데 순간 침대 기둥에 가려있던 그림이 환한 불빛속에 떠올랐다. 이제 막 성숙한 티가 나기 시작한 어린 처녀의 초상화.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반응에 놀라 눈을 뜨고 그림을 다시 바라봤다. 그림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실제 살아있는 사람이 액자 건너편에 서서 바라보는 듯 생생했다. 그러나 작품이 훌륭해서만은 아니었다. 거기엔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한시간 가량 그림을 바라보던 남자는 자신을 압도하고 심지어 오싹하게 만드는 타원형 초상화의 비밀이 뭔지 알것 같았다. 그림 속 소녀의 표정이 가진 절대적인 사실성이었다. 얼굴을 스친 붓질이 아니라 그녀의 미묘한 표정에서 생명이 숨쉬고 있었다. 남자는 서둘러 책자를 뒤적여 소녀의 초상화를 설명하는 페이지를 찾아냈다.
“그녀는 탁월하게 아름다운 처녀로 아름다운 모습만큼이나 성격도 밝고 활달했다. 열정적이며 부지런하고 엄격한 성격의 화가를 만나 사랑에 빠진 소녀는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화가와 결혼했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까불거리며 뛰어놀길 좋아하는 그녀와 달리 화가는 손에서 화구를 놓지 않았고, 그녀를 바라보는 시간보다 캔버스에 매달리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녀에게 그림은 남편의 사랑을 빼앗아가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화가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했을 때 아내는 두려움부터 느꼈다. 하지만 사랑하는 화가를 위해 못할 일은 없었다. 아내는 높은 첨탑 위의 다락방, 머리 위에서 아주 작은 빛만 들어오는 어두운 화가의 작업실에서 몇주동안 모델이 되었다. 화가는 매일같이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그림에 매달렸고, 어느순간 자신의 모델이 살아있는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는 점점 창백하게 시들어가는데 화가는 보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은 걱정했지만 아내는 불평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저명한 화가인 남편이 이 작업을 통해 정열과 기쁨을 얻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침내 그의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화가는 작업실 주위에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그림을 마치고 나갈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말 것을 지시했다. 화가가 그림 속 아내의 뺨에 홍조를 그리면 모델인 아내는 홍조를 빼앗긴 듯 창백해졌다. 빨간 입술을 그려넣는 순간 아내의 입술은 색을 잃었다. 맑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그리는 순간 아내의 눈은 빛을 잃었지만 남편은 보지 못했다. 작업을 마친 남편은 한참동안 그림을 바라보다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이 그림은 정말로 생명 그 자체로구나!’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려 아내를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죽어있었다.”
『붉은 죽음의 가면극』
오랫동안 계속된 ‘붉은 죽음’이 나라를 철저히 파괴했다. 이 세상 어떤 역병도 그 병처럼 치명적이거나 끔찍할순 없었다. 피가- 피의 새빨간 빛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가 그 병의 상징이자 봉인이었다. 일단 그 병에 걸리면 날카로운 고통과 현기증이 갑작스레 엄습하는데 이어 엄청난 양의 피가 모공에서 흘러나오면서 피부가 썩어들어갔다. 몸에 생기는 진홍색 얼룩 때문에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나 동정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마치 역병 환자라도 되는듯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그 병은 발병에서 종식까지 진행되는데 단 삼십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프로스페로 왕은 낙천적이고 겁이 없었으며 꾀가 많았다. 백성이 반으로 줄자 그는 궁정의 기사들과 귀부인, 그리고 친구들을 천명 정도 추려내 자신의 성에 초대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성은 넓고 웅장했으며 튼튼한 담장이 건물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왕은 친구들이 성에 들어오자마자 성문을 닫고 자물쇠를 녹여 봉해버렸다. 초대자가 나갈 수도 누군가 성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하면 전염병에서 완벽히 격리될 수 있다고 왕은 믿었다. 성에는 식량도 충분했다. 성밖 사람들이야 스스로 알아서 돌보면 될 것이다. 언젠가 ‘붉은 죽음’이 지나간 뒤 왕은 친구들과 함께 성문을 열고 나올 계획이었다.
왕은 성안의 친구들에게 충분한 오락거리를 제공했다. 어릿광대, 즉흥시인, 무희들과 연주자들이 항시 대기했고, 미녀들과 포도주도 넘쳐났다. 은둔생활이 시작된지 대여섯 달이 지난 어느날, 왕은 친구들을 위해 가장무도회를 준비했다. 특이한 취향을 가진 왕은 매우 대담하고 정열적이어서 간혹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기도 했는데, 그가 가장무도회를 위해 내린 지시는 각자 가장 괴상한 모습으로 변장할 것, 이었다. 왕에게 잘 보이고 또 가장무도회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의 변장은 놀라울 정도였다. 아름답고 음란하고 괴상하고 혐오스런 변장이 속출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길이 향한 곳은 한곳, 그들이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는 변장이었다. 생사가 모두 놀이에 지나지 않는 완전히 타락한 사람에게도 농담거리로 삼을 수 없는게 있는 법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수의로 칭칭 동여맨 남자는 수의의 접혀진 사이사이로 피를 철철 흘렸고, 수의가 가리지 못한 부분에는 진홍색 반점이 가득한 살덩어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붉은 죽음의 역병에 걸린 환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본 왕의 얼굴은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어떤 놈이 감히 신을 욕보이고 우리를 조롱한단 말이냐! 저놈을 당장 붙잡아 가면을 벗기도록 해라! 내가 저놈을 내일 당장 교수형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왕의 명을 따라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모습이 너무 끔찍해서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붉은 죽음의 변장을 한 남자는 아무렇지 않다는듯 어슬렁거리며 무도회장을 지나갔고, 화를 참지못한 왕이 단검을 쥐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무도회장 밖을 나서는 그의 등에 왕이 칼을 꽂으려는 순간 그가 몸을 돌려 왕을 마주했다. 무도회장 문밖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왕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너무 놀라 모두 뛰쳐나왔고, 축 늘어진채 죽어있는 왕을 발견하곤 남자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내 곧 사람들은 형언할 수 없는 경악에 사로잡혔다. 그를 붙잡은 순간 그의 몸 안에 아무런 실체도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밤의 도둑처럼 찾아온 붉은 죽음의 역병이 거기에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 둘씩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어둠과 멸망과 붉은 죽음이 모든 것 위로 군림했다.
『배반의 심장』
저한테 언제 어떻게 그런 생각이 떠오르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 생각이 들고나자 저는 밤낮 없이 그 생각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 행위엔 아무런 목적도 열정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 노인을 사랑했고, 그분이 제게 잘못한 적도 전혀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분이 저를 모욕한 일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분이 소유한 황금에 눈이 먼 것도 아니었습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건 그 노인의 눈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눈 때문이었습니다! 그 노인의 눈은 독수리의 눈처럼 엷은 막으로 덮인 연한 푸른색이였습니다. 그분의 눈길이 제게 닿을 때면 제 피는 언제나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저는 그 노인의 생명을 빼앗기로, 아주 서서히 결심을 굳혀갔던 것입니다.
저는 그 노인을 살해하기 전 일주일 동안 전보다 훨씬 더 친절하게 노인을 대했습니다. 그리고 매일밤 자정 무렵 그 노인이 잠자는 방문의 빗장을 조용히 풀어 열었습니다. 머리가 들어갈 정도만 문을 열고 갓을 씌워 빛을 가린 등불을 먼저 집어넣고, 그가 깨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머리를 밀어 넣었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문쩌귀에서 삐거덕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그리고 갓을 벗겨 등불을 그의 눈을 향해 비췄습니다. 저는 무려 일주일 밤 동안, 그것도 꼭 자정 무렵에 계속 이처럼 조심스럽게 접근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의 방을 찾아가 인사말을 건네는 것으로 그가 무엇이든 눈치챈 것이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우쭐하고 의기양양해지는 기분을 억누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팔일째 되던 밤, 그의 방문을 열었을때 나도 모르게 낄낄댔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노인은 뭔가에 놀란듯 흠칫했지만 잠에서 깨지는 않았습니다. 창의 덧문을 닫아놓아 칠흑같이 어둔 방이 제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머리를 밀어넣고 등불의 갓을 벗기려는데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걸쇠에 부딪쳐 소리가 났습니다. 노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거기 누구냐!”하고 외쳤습니다. 저는 침묵한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노인이 다시 잠들길 기다렸지만 그는 오랫동안 침대에 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가벼운 신음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에는 죽음의 공포가 담겨있었습니다. 저 또한 어둔 밤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 이미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더욱더 무시무시한 공포로 몰아넣는 내 자신의 신음소리를 잘 알기에 낄낄거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동정했습니다.
잠에서 완전히 깬 노인은 바람소리겠지, 쥐가 지나가는 소리 같았어, 라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이런 추측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겠지만 그는 알았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그리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나의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그가 느끼고 있다는 것 또한 확실했습니다. 어둠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노인은 잠들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꽤 참을성 있게 기다린 저는 등불을 씌운 갓을 아주 조금 열었습니다. 마침내 거미줄처럼 가는 한줄기 흐린 광선이 열린 등불의 조그만 틈새를 빠져나와 노인의 독수리눈을 정면으로 비췄습니다. 눈은 떠져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그리고 마치 천으로 감싼 손목시계에서나 날법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노인의 심장박동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더욱더 제 화를 부채질했습니다. 마치 군인의 용기를 북돋우는 북소리와도 같았습니다. 그의 심장박동 소리는 커지고 또 커져서 그의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이웃들의 귀에도 들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엄습했습니다. 저는 등불을 가리고 있던 갓을 활짝 열어젖히고 고함소리를 내지르며 방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노인은 딱 한번,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희미하게 이어지던 숨소리도 어느순간 정적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저는 노인의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의 눈 때문에 시달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저는 서둘러 그의 시체를 토막냈습니다. 머리와 팔과 다리를 차례차례 잘라냈습니다. 그런 후 마룻바닥에 깔린 마룻장 세 개를 들어올려 시체 토막을 그 아래 각재들 사이에 내려놓았습니다. 마룻장을 덮어놓자 감쪽같았습니다. 마룻바닥에선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마무리 작업을 하고 나니 새벽 4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가보니 경찰관 세명이 찾아와 있었습니다. 한밤중 고함소리를 들었다며 이웃들이 신고를 한 것입니다. 저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제가 잠을 자다 꿈속에서 소리를 질렀다고 말했습니다. 의심스러우면 둘러보라며 그들을 집안에 들였습니다. 노인은 여행중이고 저혼자 있으니 걱정이 된다, 혹시 모르니 아주 샅샅이 수색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신감에 도취된 나머지 시체를 숨긴 바로 그 마루 위에 의자를 갖다놓고 피곤하실테니 좀 앉으시라 권했습니다. 경찰관들은 만족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잡담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저는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귓가를 윙윙 울리는 이명이 괴로웠습니다. 그들이 이제 그만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앉아서 잡담을 계속했습니다. 이명은 계속되었고,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어느순간 그 이명이 내 귓가에서 들리는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건 천으로 감싼 손목시계에서나 날법한 심장박동 소리였습니다. 저는 점점 숨이 가빠졌습니다. 그러나 경찰관들은 그 소리를 못 듣는 것처럼 잡담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화가 났습니다. 그들한테도 그 소리는 들릴 것이다! 그들은 의심하고 있다! 다만 내 공포를 비웃으며 즐기는거다! 소리는 점점 커졌습니다. 커진다! 커진다! 커진다! 커진다!! 결국 저는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나쁜 놈들 같으니! 더 이상 시치미 떼지 마! 내가 한 짓을 자백할테니! 이 마룻장을 뜯어보라고! 여기, 바로 여기! 이 소린 바로 그 노인네의 흉측하기 짝이 없는 심장박동 소리야!”
『검은 고양이』
남자는 어려서부터 애완동물을 좋아했다. 무지한 짐승의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에는 사람의 가슴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결혼을 일찍 했는데 아내 또한 동물을 좋아해서 그들 부부는 새와 금붕어와 개, 토끼와 작은 원숭이,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게 되었다. 그중 고양이는 몸집이 아주 크고 털은 칠흑같이 까맸으며 놀랍도록 영리했다. 플루토라 이름지은 고양이는 특히 남자를 잘 따라서 그가 어디에 가든 졸졸 따라다녔다.
원래 음주를 즐기던 남자의 성격은 시간이 흐르면서 급격하게 변했다. 아내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손찌검까지 하게 되었다. 애완동물들은 그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어느날 밤 만취한채 집에 돌아온 남자의 눈에 고양이가 들어왔다. 얼핏 자신을 피하는 것 같다고 느낀 남자는 막무가내로 화가 나서 고양이를 확 낚아챘다. 놀란 녀석이 이빨로 남자의 손을 물자 남자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난 것처럼, 온몸의 모든 섬유조직 하나하나가 극악한 증오심으로 전율했다. 남자는 주머니칼을 꺼내 한손으로 고양이의 목을 눌러잡은 뒤 녀석의 한쪽 눈을 천천히 도려냈다! 다음날 잠에서 깨어 이성을 되찾자 지난밤 저지른 일에 대한 공포와 후회의 감정이 솟아났지만 그래봤자 그런 감정은 희미하고 애매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극단적인 타락으로 빠져들었고, 잔혹한 행위에 대한 기억은 술과 함께 잊혀졌다. 그사이 고양이는 상처를 서서히 회복했다. 눈을 잃은 자리에 생긴 텅빈 구멍은 보기에도 매우 흉측했지만 플루토는 더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는것 같았다. 남자가 다가가면 겁에 질려 도망갔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평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는 자신이 사랑했던 짐승이 이젠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피한다는 사실이 서글펐지만 서글픈 감정이 짜증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회복불가능한 파멸에 이르려는듯 남자에게 도착적인 심리가 찾아왔다. 도착적 심리에 대해서 철학과 지식은 아무런 설명도 제공하지 못했다. 남자는 자신의 도착적인 심리가 인간 감정의 원초적 충동 중 하나, 즉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인간으로부터 결코 분리해낼 수 없는 본질적 기능 내지 감정 중의 하나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해서는 안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사악하거나 어리석은 행위를 저질러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법에 어긋나는 짓임을 알면서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최상의 판단력을 무시하고 그 법을 위반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히는게 바로 인간이 아니던가. 오로지 잘못을 저지르기 위해 잘못을 저지르게 만드는 인간 영혼의 불가해한 갈망 때문에, 남자는 볼썽사나운 고양이를 아예 죽여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어느날 아침, 남자는 냉정하고 침착하게 고양이의 목에 올가미를 씌운 다음 집앞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짐승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기에 그는 비통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 동물이 자신에게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행위가 신의 자비심이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의 영혼을 쫓아낼 것이고 자신은 기꺼이 그것을 감내하리란 확실한 믿음으로 녀석의 목을 매달았다. 그날밤, 남자의 집에 불이 났다. 집 전체가 활활 타오르는 대화재에서 남자는 아내와 함께 몸뚱아리만 건졌고, 전재산을 잃었다. 모든 불이 꺼지고 남자는 폐허가 된 집터를 둘러봤다. 무너진 벽들 사이로 단 하나의 벽만이 성하게 남아있었다. 바로 남자의 침실 머리맡에 있는 벽이었다. 사람들이 그 벽 주위로 몰려들었다. 벽에는 엄청나게 큰 고양이의 모습이 하얀벽 위에 엷은 부조처럼 조각되어 있었다. 멀쩡하게 남아있는 벽면에 새겨진 고양이는 주인을 지키는 신전의 파수꾼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실로 경이롭다 할만큼 또렷한 그 흔적, 그 짐승의 목에는 올가미가 둘러져 있었다.
남자는 미신을 믿지 않기에 절망이 몰고온 혼동과 공포일 뿐이라 생각하며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이후 몇 달간 고양이의 환영이 남자를 괴롭혔고, 이와 상반된 감정으로 고양이가 없어져 적적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가 커다란 술통 위에 턱하니 앉아있는 검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다가가 만져보니 플루토만한 검은 고양이였다. 플루토는 온몸이 검은색이었는데 그 고양이는 그을린 것처럼 하얀 반점이 있었다. 그 녀석은 남자가 만지자 즉시 몸을 비비며 그르렁댔다. 남자는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고양이는 마치 자기 집에 귀가한양 행동했고, 이내 아내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자의 마음은 변했다. 아침이 밝아 녀석을 자세히 보니 그 고양이가 플루토처럼 한쪽 눈이 없었기 때문이다. 끔찍했다. 혐오스러운 그 고양이가 자신을 잘 따르는 것도 싫고 짜증났다. 감정은 금세 증오로 발전했다. 이전에 저지른 일에 대한 잔혹한 기억 때문에 남자는 고양이를 학대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 가증스러워 역병의 숨결을 피하기라도 하듯 피해다녔다. 그럴수록 아내는 그 고양이를 더욱더 아끼고 사랑해줬다. 당장 죽일수도 있는 짐승인데, 한낱 짐승에게 저지를 수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피하게 된다는 사실이 슬슬 남자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던 어느날, 새로 살림을 꾸린 허름한 집에서 지하실에 둔 물건을 가지러 남자는 아내와 함께 어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고양이가 눈치없이 남자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고, 남자는 놀라는 바람에 거꾸로 넘어질뻔 했다. 그는 화가 치밀었다. 때마침 지하실에 있던 도끼를 집어들었다. 고양이를 향해 도끼를 내리치려는데 아내가 말리고 나섰다. 말리는 아내가 더 싫었다. 남자는 아내를 향해 도끼를 내리쳤다. 그녀는 신음소리 한번 못내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남자는 시체를 치워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감춰야 했다. 중세의 수도사들처럼 벽속에 넣고 발라버리는 방법이 떠올랐다. 지하실 벽은 이사를 하면서 최근에 공사를 했는데 공기가 습한 탓인지 회반죽이 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한쪽 벽에 굴뚝 겸 벽난로 구실을 하던 데가 있었는데 거기에 벽돌을 쌓아 회칠을 해서 막아놓은게 보였다. 툭툭 쳐서 벽을 부수고 벽돌을 빼내자 시체를 넣을 공간이 보였다. 아내의 시체를 밀어넣고 벽돌을 원래 모양대로 다시 쌓아올렸다. 석회와 모래와 섬유재를 섞어서 회반죽을 만들고 다른 벽과 구별이 안되게 정성들여 발랐다. 워낙 축축한 지하실이라 감쪽같았다. 작업을 마친 남자는 이 일의 원흉인 고양이를 찾았다. 이번에야말로 그 녀석을 죽일테다. 그러나 녀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밤 남자는 아주 오랜만에 편안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내의 부재를 의심하는 이웃들도 있었지만 대답을 꾸며내기는 쉬웠다. 아내를 죽인지 나흘째 되던 날 경찰관 몇명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발각될리 없다고 굳게 믿은 남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결국 경찰은 수색의 결과에 완전히 만족해서 떠나려고 했다. 남자는 자신의 완전범죄에 의기양양해서 입이 간질거렸다. “벌써 가시려구요? 뭐 어쨌든 여러분의 의심을 누그러뜨릴수 있어서 기쁘네요.” 과시욕에 사로잡힌 남자는 일상적인 대화를 해보자는듯 경찰관들에게 자신의 지하실이 얼마나 튼튼하게 잘 지어졌는지, 최근에 회반죽을 새로 발랐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급기야 아내의 시체를 넣어놓은 벽을 짚고 탕탕 두들기기도 했다. 그때였다. 그 소리에 화답하듯 벽 저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어린아이가 훌쩍훌쩍 우는 소리처럼 짧게 끊어지던 소리가 길고 요란한 고함소리로 변했다. 공포와 의기양양함이 반반씩 섞인듯한 통곡소리, 울부짖는듯한 비명소리, 지옥에서나 들릴 것 같은 소리였다. 남자는 정신을 잃고 비틀거리다 주저앉았고, 경찰관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건장한 팔로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미 엄청나게 썩어들어간, 굳은 피가 여기저기 얼룩진 아내의 시체가 똑바로 선채 목격자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의 머리 위에는 붉은 입을 활짝 벌리고 이글거리는 외눈을 한 검은 고양이가 앉아있었다.
불안한 정신과 경박한 행동 때문에 자신의 범죄를 완성하지 못하는 에드거 앨런 포의 인물들을 보면서 한번쯤 제대로 해봐도 좋잖아, 라고 생각했다면 『아몬티야도 술통』이 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모욕한 친구를 죽이기 위한 완전범죄. 남자는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를 유혹하기 위해 카니발의 밤, 술에 취해 행진 중인 친구에게 다가간다. 매우 귀한 아몬티야도 와인을 구했다는 말과 함께 친구가 경쟁자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와인 감정을 받을까 싶다는 말도 한다. 친구는 무슨 말이냐, 그 정도 와인이라면 내가 감정을 해주겠다며 남자를 따라나선다. 늦은밤, 남자의 지하 와인창고로 따라들어가는 친구. 납골당과 와인창고를 겸한 오래된 지하실은 매우 좁고 길고 어둡다. 남자는 자신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도록 친구에게 밤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자,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받아도 된다며 말린다. 그럴수록 괜찮다며 어서 와인을 보자는 친구. 둘은 지하실의 끝에 다다르고 화강암 바위가 막고있는 벽면에는 철못 두 개가 나란히 박혀있다. 순식간에 친구를 포박해 사슬로 묶고 자물쇠를 잠그는 남자.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친구에게 웃음을 날린 뒤 준비된 재료로 벽돌을 쌓기 시작한다. 한단 두단 말없이 벽돌을 쌓는 남자를 보며 친구는 어느새 술이 확 깨서 장난그만 치라며 웃으며 말한다. 남자도 농담으로 받아친다. 농담을 주고받지만 남자는 진지하고, 친구는 자신이 여기서 죽을 것임을 깨닫는다. 자신을 노려보며 고함을 치는 친구와 그 친구의 얼굴을 마주보며 벽돌을 하나하나 높이 쌓는다. 직접적인 가해는 없으나 친구는 남자가 자신을 죽이는 것을 알고 남자는 자신이 지금 살인을 하고 있다는 걸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다. 벽을 거의 완성하는 순간에는 소리를 내지르던 친구도 잠잠해지고 남자는 감쪽같은 벽면을 바라보고는 만족해서 돌아선다.
“나는 궁극적으로 복수하자고 결심했다. 그러나 결심이 확고한만큼 위험도 원치 않았다. 당연히 그를 처벌해야 할뿐 아니라 그 처벌로 인해 내가 화를 입어서도 안된다. 복수가 나를 압도해 버린다면 그런 복수는 잘못된 것을 교정한 행위라고 볼수 없다. 또한 복수자가 잘못을 행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복수자로 느끼게 하지 못한다면, 그런 경우 또한 복수는 완성되지 않는다.”
photo by Harry Callahan
「꿈」중에서
아! 내 젊은 삶이 영속하는 꿈이었으면!
나의 영혼이 깨어나지 않았으면, 영원의
광선이 내일을 데려올 때까지.
그래! 그 긴 꿈이 희망 없는 슬픔뿐이라도,
깨어있는 삶의 차가운 현실보다는
그편이 차라리 좋으리라. 아름다운 대지에
태어난 순간부터 마음이 내내 깊은 열정의
혼돈이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에게는.
그것은 한밤에 나를 덮쳐, 내 영혼에 잔상을
남기고 떠난 으스스한 바람- 혹은 드높이 솟아
선잠 든 나를 너무나도 차갑게 비춘
달빛- 아니면 별빛- 어찌되었건 그 꿈은
저 밤바람 같았으니- 그냥 지나가게 둘밖에.
그저 꿈이었지만, 나는 내내 행복했다.
내내 행복했다- 해서 나는 그 주제를 애호한다.
인생을 생생하게 채색하는 꿈들을!
실재와 유사의 저 덧없고, 아련하고,
몽롱한 다툼 속에서, 무아경의 눈에,
젊은 희망이 가장 해맑은 시간에 경험한
일들보다도 한결 더 아름다운 낙원과 사랑의
선물들- 모두 우리 것!- 을 데려오는 꿈들을.
「꿈속의 꿈」중에서
밀려드는 파도에 괴로워
울부짖는 바닷가에 서 있다가,
금빛 모래 알갱이들을
손에 쥐어본다-
겨우 한 줌! 그마저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심연에 파묻혀버린다,
우는 사이에- 우는 사이에!
아 신이시여! 더 꽉 쥐어도
정녕 붙들 수 없는 건가요?
아 신이시여! 무자비한 파도로부터
모래 한 알 얻어낼 수 없나요?
우리가 보거나 그런 것 같은 모두가
그저 꿈속의 꿈일 뿐인가요?
「홀로」중에서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남들과
달랐다- 나는 남들과는
다르게 보았다- 공동의 샘에서
내 열정을 기를 수 없었다-
똑같은 원천에서 내 슬픔을
퍼내지도 않았다- 같은 음조에
마음 설레 기뻐할 수도 없었다-
내가 사랑한 모두를- 홀로 사랑했다-
그러다- 나의 어린시절- 아주 사나운
폭풍우 같은 인생의 새벽에- 선과 악의
온갖 심연에서 나를 하염없이
동여매는 신비가 이끌려나왔다-
급류로부터, 혹은 샘으로부터-
산의 불그스름한 절벽으로부터-
금빛 가을 색조로
나를 감싸고 두리둥실 떠간 해로부터-
나를 스치고 휙 날아간
하늘의 번개로부터-
천둥으로부터, 폭풍우로부터-
그리고(하늘이 온통 푸르렀던 날)
악령의 형상을 띠고
눈에 들어온 구름으로부터-
photo by Karl Blossfeld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