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땡 뒤 가르, 회색노트
내가 가장 좋아하는 러브스토리가 있다. 영화로는 왕가위 감독의『해피투게더』가 그렇고, 책으로는『회색노트』다. 이 책을 러브스토리라 하는건 억지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 설레고 뜨거워졌었다. 그러니 누가 뭐라해도 내겐 러브스토리다. 새삼 그러고보니 두 이야기에 공통점이.. 좋아하는 만화가 요네다 코우 또한.. 나도 꽤 일관된 취향을 가지고 있구나.
『회색노트』는 마르땡 뒤 가르가 193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띠보가의 사람들」이라는 7부작 대하소설의 제 1부에 속하는 글이다.「띠보가의 사람들」은 20년에 걸쳐서 7부작, 총 10권의 책으로 발표되었는데, 그 시작인『회색노트』는 주인공과 배경을 소개하는 아주 짧은 단편이다. 오래전 스무살의 봄에 이 책을 읽었었다. 오늘 이 책을 다시 펼쳐보니 샤프로 끄적끄적, 그 시절의 내가 적어놓은 메모와 밑줄들이 보인다. 밑줄과 글자조차 서툴고 어리게 느껴진다. 하지만 여전히 책의 내용만큼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순수와 열정으로 가득차서 감동했다. 좋구나.
파리의 아미요 중학교에서 두 학생이 동시에 행방불명되었다. 집에 돌아오지 않는 둘째아들 자크를 찾아 띠보 씨와 그의 맏아들 앙뜨완느는 밤늦게 학교를 찾아간다. 기숙사도 운영하는 가톨릭 학교에서 늙은 신부이자 교무주임이 나와 두 사람을 맞이한다. 아드님은 오늘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 아빠와 형은 놀라서 묻는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교무주임은 말한다. 자크가 학교에서 불온한 책을 읽은 게 발각되었다. 그래서 점심시간,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몰래 소지품 검사를 실시했다. 그러다 책상 깊숙히 숨겨놓은 회색노트가 발견되었고, 그 내용의 심각성 때문에 학교에서 어떤 처분을 내릴까 고민하는 사이 노트가 없어진 걸 알게된 자크가 흥분해서 교무실을 찾아왔었다. 개인소지품을 함부로 압수했다며 감히 신부이자 교무주임에게 버럭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대길래 적당한 처분이 내려질때까지 근신하라고 한 것이 바로 어제, 그리고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평소 불같은 성격의 자크를 잘 아는 아빠와 형은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그렇다면 어딘가에 숨어있을게 뻔하니 찾아봐야겠다고 말한다. 이때 늙은 신부가 묘한 말로 두 사람을 붙잡는다. 다른 한 명도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만. 다른 한 명이라니, 누구? 자크와 회색노트를 교환하며 비밀편지를 왕래한 녀석이 있습니다. 노트에는 이니셜밖에 없지만 필체를 보고 찾아냈죠. 다니엘이라는 녀석이더군요. 아십니까? 프로테스탄트 집안이죠. 아드님은 타락한 불량소년에게 영향을 받은것 같습니다. 노트의 내용은 유감스럽게도 위험한 성질의 우정이었습니다.
회색노트의 시작은 이랬다. 처음엔 무심코 시작된듯 단어의 뜻이나 맞춤법을 묻는 질문들이 오고갔다. 그러다가 차츰 자크가 시를 쓰면 다니엘이 교정하고 주해를 붙이는 식의 편지가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소년의 우정편지는 지나치게 순수해서 눈물겨운, 미묘하고 열정적인 감정의 교환으로 변해갔다.
사랑하는 벗이여, 만일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낙제꾸러기, 바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어떤 열정이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너의 덕택이다. 나는 그러한 때, 아, 그것은 너무나 가질 기회가 적었고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들이 서로의 것이 될 수 있었던 그러한 때를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너는 나의 유일한 사랑! 나는 다른 사랑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너로 인한 열렬한 추억이 곧 나의 눈앞을 막아설테니까. 오오, 언제, 언제나 우리는 자유를 가지게 될까. 언제쯤 우리는 같이 살며 여행할 수 있을까……. 기다리는 건 싫어. 되도록 빨리 답장해줘.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을 껴안는다. 뻬르론느가 천사같은 유니스를 껴안듯이! 잘 있어. 그리고 나를 사랑해줘! _ J.
나는 네가 다른 하늘 아래서 홀로 살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 두 마음 사이에 맺어진, 진실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정이 나로 하여금 너를 찾게 할 것 같다. 우리들의 우정 위에는 시간도 흐름을 멈춘 것이 아닐까. 너의 편지를 보고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그것을 말로 하기는 불가능하다! 너는 나의 벗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 이상의 것, 나의 진정한 반신(半身)이 되지 않았는가. 나는 살고 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너의 애정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다! 나는 너의 애정을 결코 의심하지 않겠다. _ D.
오오 나의 정다운 벗이여. 나는 종종 미친듯이 즐거운 가운데서도 쓰디쓴 회상에 사로잡히곤 해. 내 앞에는 언제나 도달하기 어려운 높고 높은 이상(理想)의 유령이 서있기 때문이야. 나는 말이야. 너무나 현실적인 이 세계를 떠나서 살고 있는 핏기 없고 창백한 얼굴을 가진 수녀들의 법열경(法悅境)에 이른 기쁨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옥 철창에 부딪쳐 무참히 꺾여 버려야 하다니! 적의를 품은 세계 안에서 나는 나홀로 있어. 나는 나이도 아직 어린데 벌써 내 뒤에는 부러진 초목이 즐비하고, 비로 변해버린 이슬, 애타는 욕망, 쓰디쓴 절망들이 놓여있어! 사랑하는 벗이여, 나의 주먹에서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지만 나에겐 한 가지, 나는 너의 것이라는 한량없는 기쁨이 있어. 만일 네가 없다면 나는 자살하고 말 거야. _ J.
어떻게 하면 너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그 고민에서 너를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같은 절망의 부르짖음을 그치게 할 수 있을까? 아니야. 이상(理想)은 인생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야. 내 생각에 이상이란 지상의 가장 천한 것에까지 위대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해.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 조물주가 신성한 능력이 되라고 우리들 속에 불어넣은 모든 것의 완전한 발전, 그게 이상이 아닐까. 죽을때까지 충실한 벗이여. 언제나 너의 행복만을 바라는 너의 벗을 믿는다면 너는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너를 멸시하는 외부의 세계를 위하여 살고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너를 생각하고 모든 사물에 대하여 너와 똑같이 느끼는 사람(그건 나다!)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길 바래. _ D.
용서해줘. 나의 과격하고 허황되고 경박한 성격을. 나는 암담한 절망을 느끼다가도 엉뚱한 희망을 품곤 해. 배 밑창에 있다가 다음 순간엔 구름 위에까지 떠올라가지. 나는 일관(一貫)한 것은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너를 빼놓고는!! 나는 너를 무척 존경해. 너의 너그러움은 존경할만하고 너의 꽃같은 감수성이 그렇고 너의 모든 생각안에, 모든 너의 행동안에, 그리고 너의 사랑의 기꺼움 안에까지 볼 수 있는 진지함까지. 모든 너의 애정, 너의 모든 감동, 그것들을 나는 너와 함께 느낀다. 우리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었고 고독으로 황폐한 우리들의 마음이 다시는 떨어질 수 없으리만큼, 육체적인 포옹속에 합칠 수 있었다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자! 무슨일이 있어도 결코 나를 버리지 말아줘!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들 서로 안에 '우리들의 사랑'이라는 열정적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영원히 기억하자. _ J.
나는 내일 열 네 살이 돼. 시간은 흘러흘러 우리들을 시들게 하겠지. 그러나 사실에 있어선 아무것도 변함이 없어. 언제나 똑같은 우리들이다. 나 역시 기운이 빠지고 나이를 먹었다는 느낌 이외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으니까. 그래도 역시… 어젯밤 나는 잠자리에서 뮈세를 읽었어. 전에 처음에 읽었을 때는 처음 몇줄을 읽을 때부터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렸는데 어제는 아무런 감격도 없었고 구절들이 잘 다듬어졌다고 생각할 뿐이었어. 아, 나의 마음이 이처럼 시들지 않아주었으면! 나는 생활이 나의 마음과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것이 두려워. 모든 것을 쏟아버리는 회의(懷疑)가 나를 아프게 하지 않길 바래. 어른이란 슬프지 않니? 왜 이론을 버리고 마음의 온힘을 다하여 살지 못하는 걸까. 나는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이러니저러니 생각하는 일없이 그저 위험속으로 뛰어드는 젊음의 의지가 부러워. 너는 나의 진지함을 높게 평가하였지만 그것이야말로 나의 빈곤, 나의 저주받은 운명이야. 나는 이꽃에서 저꽃으로 꿀을 찾아다니는 꿀벌이 아니야. 나는 마치 한송이 장미꽃 품속에 틀어박혀 있는 풍뎅이랄까. 그곳에서 살다가 기어이 장미꽃의 화관이 아물어버리면 이 마지막 포옹 속에 질식하여 죽을 풍뎅이. 오 벗이여, 너에 대한 나의 애정도 그토록 충실하다. 너는 나를 위해 이 황폐한 땅 위에 피어오른 장미꽃, 정다운 너의 가슴속 깊이 나의 컴컴한 슬픔을 파묻어다오. _ D.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사랑, 그리고 나는 한 사랑을 가졌을 뿐, 그것은 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이러한 감정을 나를 전적으로 이해해주는 어떤 사람, 그의 마음속에 쏟아넣기를 원했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가공의 인물을 향해 수많은 편지를 쓰곤 했어. 그런데 갑자기 하느님은 이 이상의 존재에게 육신을 주었고 그렇게 나타난 게 바로 너였지. 우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미궁에서 헤매일뿐 시초를 찾기 힘들지만 지금 우리의 사랑만큼 굳건하고 숭고한 것을 나는 생각할 수가 없어. 펜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써놓고 보면 사진을 찍은 것 같은 기분, 전부를 알리기엔 늘 부족하기만 하다. 너는 아마도 도움과 위로와 희망을 바랄텐데 나는 정다운 말은 커녕 자기를 위해서밖에 살지 못하는 한낱 에고이스트의 마음의 눈물밖에 적지 못하는구나. 날 용서해줘. 내가 너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는 놈이라도 나를 버리지 말아줘. 네가 없으면 나는 죽어버릴거야. _ J.
두 소년의 비밀스런 회색노트는 학교 선생들의 손을 거쳐 자크의 아빠와 형의 손에까지 들어왔다. 다음날 자크의 집에선 대책회의가 열렸다. 자크의 아빠와 형, 띠보 집안과 각별하게 지내는 신부는 물론이고 학교에서는 교무주임이 왔고 자크를 키워온 늙은 유모까지 불려와 응접실에 모였다. 학교에서 사정을 듣고 다니엘의 엄마 또한 황급히 찾아왔다. 두 아이가 함께 없어진만큼 두 집이 힘을 합쳐 아이들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근심으로 가득한 다니엘의 엄마를 보며 자크의 아빠는 버럭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았다. 사회적 지위와 입장이 있는만큼 섣불리 드러내면 신문기자들이 눈치챌텐데 그러면 자크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게다가 신분도 종교도 별볼일 없는 다니엘과 함께라니, 이토록 망측한 내용의 회색노트라니!! 분명 평생의 수치가 될게 뻔하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신중하게 나서야 하는 때에 눈에 띄게 협력이라니 말도 안된다.. 다니엘의 엄마는 자크 아빠의 태도에 놀라 숨이 막혔지만 용기를 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학교에서 뭐라하든 아이들이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의 말만 듣고 판단하기엔 다니엘은 너무 순수한 아이다. 그러자 자크의 아빠는 다니엘의 엄마에게 회색노트를 건네며 이걸 보고도 그렇게 태평한 소리가 나오는지 보자고 한다. 그러나 다니엘의 엄마는 노트를 외면했다. 저는 한 줄도 읽지 않겠어요. 그애는 알지도 못하는데 그애의 비밀을 여러사람 앞에서 폭로하다니! 그애에게는 자신을 변명할 여지조차 없다는 말인가요? 전 다니엘을 이런 취급을 받도록 키우지는 않았어요. 다니엘의 엄마는 자크네 집을 나온다.
그 시간, 두 아이는 기차를 타고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 그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이상향! 아프리카 대륙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야만 했다. 하지만 밤늦은 시간 여관을 잡는 것부터 만만치 않았다. 학교밖 세상에선 너무도 어린 두 소년, 그나마 두살 정도 더 나이들어 보이는 다니엘이 값싼 여관을 잡아 두 아이는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다음날, 빵조각을 뜯어먹으며 항구를 서성이지만 보호자 없이 배를 타려는 아이들을 진지하게 봐주는 어른은 없었다. 심지어 경찰에 넘기겠다며 협박을 서슴치 않았다. 선원들을 피해 도망치다 떨어져서 달리게 된 두 아이. 서로를 찾아 거리를 헤매다 밤이 되고, 자크는 항구의 나무상자 사이에서 쪽잠을 잔다. 다니엘은 자크와 함께 갔던 빵집을 두리번거리다 친절한 여인의 도움으로 그녀의 집에서 잠들게 된다. 그리고 얼토당토않게 동정을 잃는다. 땀에 젖은 호기심과 혐오를 동반한 쾌락. 이튿날 자크와 다니엘은 겨우 만나고 다음 항구를 향해 길을 떠나지만 맞잡은 손과 달리 자크와 다니엘의 마음은 이미 방향이 비스듬히 갈렸다. 다음 항구에서는 반드시 배를 탈 수 있을 거란 기대로 가득한 자크, 하지만 다니엘은 길가의 소녀들을 보면 어느새 얼굴이 붉어지고 슬슬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자크에게 들킬 수 없는 감정. 무모하지만 열정적인 자크를 다니엘은 사랑한다. 자크와 함께 있고 싶다. 갈 때까지 가보자. 두 소년이 힘겹게 걸어가는 길, 술통을 가득 싣고 지나가던 마차가 제풀에 넘어져 말들이 버둥대다 그중 한 마리가 마차에 깔리고 마구에 목이 졸려 눈이 뒤집힌다. 마부는 말을 구하려 애쓰지만 결국 말은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둔다. 사고가 마무리되고 씁쓸하게 담배를 피우며 죽은 말을 바라보는 마부, 저녀석을 살릴 수 있다면 손가락 두 개라도 내놓을텐데.. 마부의 후회는 안타깝지만 마차에는 너무 많은 술통이 실어졌고 마부는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가져가기 쉽게 이리저리 관절을 꺾어 접어놓은 죽은 말의 모습은 처참하기만 했다. 이 광경을 두 소년이 바라본다. 시커먼 죽음의 현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크와 달리 그 순간에도 다니엘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집중한다. 여동생의 피아노소리 같다. 엄마와 동생은 잘 있을까? 서로의 전부를 알고 있고 전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두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된다. 그렇다고 전부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집을 나온지 나흘째 되던 날, 두 소년의 괴이한 행색과 여행루트를 의심한 여관주인이 경찰에 신고, 둘은 경찰에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두 아이의 신분은 금새 밝혀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결정된 구치소에서의 마지막 밤, 겉으로는 화가 난척 하지만 다니엘의 마음엔 안도감이 몰려오고 절망으로 가득한 자크만이 가슴을 두드리며 발을 동동 구른다.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가출로 인해 딴집살림을 하던 아빠가 오랜만에 들어온 다니엘의 집,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뜨겁게 안고 눈물을 흘리던 엄마가 바람둥이 아빠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여자를 느끼는 다니엘. 이전에는 알지못했던 엄마의 어떤 부분. 다니엘은 며칠 사이 달라졌다. 그 시간, 다니엘을 집까지 바래다준 자크와 형 앙뜨완느는 마차를 타고 돌아가고 있다. 저기, 자크야.. 다니엘과는 어떤 사이니? 어떤 사이냐니.. 친구야, 내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하나뿐인 친구. 그게.. 형한테는 말할 수 없는 거니? 형은 늘 바쁘잖아. 다니엘은 안 그래. 언제나 내 말에 귀기울여주고 슬플 땐 나를 꼭 안아준단 말이야. 그래, 그렇구나. 좋은 친구를 뒀네..
집에 도착한 자크. 평소와 달리 현관에 불빛이 환하고 여종들이 모두 복도로 나와 서있다. 뭐 구경났어?! 지금 이 시간이라면 실내복을 입고 있을 아빠조차 프록코트 차림으로 서재 앞에 우뚝 서있다. 다니엘의 엄마처럼 두팔 벌려 나와주지 않는 아빠가 서운한 자크, 잘못을 뉘우치고 달려와 아빠앞에 무릎꿇지 않는 아들이 못마땅한 자크의 아빠. 상대가 먼저 무언가 하길 바라며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던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에 상처되는 말만 쏟아내고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다음날 아침, 침대에 걸터앉아 평온한 아침의 소리를 듣던 자크는 생각한다. 파티라도 하는듯 온집안을 밝힌 불들이며 프록코트 차림의 아빠는 분명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그렇다면 어제는 고집을 부리지말고 아빠에게 좀더 예의바르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아빠에게 가서 죄송했다고 말할까? 이때 친하게 지내는 신부가 조용히 자크의 방을 노크한다. 자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이듯 말한다. 아버지는 좀 화가 많이 나셨단다. 네가 눈물도 반성도 보이지 않은데 크게 실망하셨어. 그래서 당분간 너를 멀리 보내고 싶어하셔. 네가 뉘우치고 돌아오길 바라시는 거지.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속죄되지 않는 잘못은 없으니까. 지금은 아버지 말씀대로 하는게 좋을것 같아.. 조금전까지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반성과 희망으로 가득찼던 가슴이 산산히 부서지는 걸 느끼는 자크. 신부가 나간 방문을 닫고 의자로 바리케이트를 쌓는다. 다니엘에게 편지를 쓰고 창밖을 보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 앞에 편지를 떨어뜨린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를 물어뜯는다. 이제 그에게는 자기의 절망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자 하는 의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다니엘은 그날 자크의 마지막 편지를 받았다. 나를 선량하게 만들어주던 너를 더이상 볼수 없게 되었어. 아빠는 나를 멀리 보내겠다고 하셔. 내가 만약 견딜수 없다면 나는 자살을 할 생각이야. 내가 죽는다면 너와 나를 떨어뜨려놓는 가족들, 내가 그들 때문에 죽었음을 꼭 전해줘.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사랑했어. 하지만 내가 저승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일 거야. 사랑하는 나의 벗, 아듀!
시간이 흐른 뒤「띠보가의 사람들」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는데 읽으면서 막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회색노트』도 그리 말랑말랑하지만은 않아서 시니컬한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매섭다 했었는데 시간이 흘러 주인공들이 어른이 되고 늙어가는 과정을 담은「띠보가의 사람들」은 순수는 타락하고 열정은 후퇴하며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허세로 가득차기 때문에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지나치게 솔직하고 현실적인 발언이 아이를 상처입히듯이「띠보가의 사람들」은 『회색노트』를 사랑하는 나를 상처입혔고, 그래서 나는 마음속에서「띠보가의 사람들」을 지우고『회색노트』만 남겼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끔 마음속으로 자크를 외치곤 한다.『해피투게더』를 보며 보영을 연기한 장국영의 웃음과 눈물에 깊이깊이 매혹되었던 것처럼. 사랑은 변하기도 하고 끝나기도 하지만 그림자는 길고 짙기에.
추신. 진아에게
연락이 안되어 미안. 어떻게 말을 할까.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지만 아직은 아무말도 하고싶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어서. 난 지금 우주여행 중이야. 지극히 크고 지극히 조용한 우주를 지나며 평심을 찾으려 해. 걱정하지말고 즐겁게 떠올려줘. 동그란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두둥실 떠다니는 나를. 언제든 돌아오면 연락할게. 지선이의 4주기를 맞아 모처럼 들어와 연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