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에 빠져들다, 블라인드
참 아름다웠다. 어린시절 러시아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바로 그 청회색 컬러의 세상이 펼쳐지고 등장하는 배우는 극히 한정된, 그리고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뛰어난 배우들에 의해, 그리고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감독에 의해 너무나 짜임새있게 만들어진 영화였다. 호흡이 무척 느린데도 불구하고 집중력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반갑고 좋았다.
블라인드 Blind (2007,네델란드) ; 타마르 반 덴 도프 감독, 요런 셀데슬라흐츠, 할리나 레인 주연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고 포악하게 변해가는 루벤을 위해 루벤의 엄마는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여자, 마리를 집안에 들인다. 마리의 첫인상은.. 구미호 같았다. 백발에 가까운 머리, 창백한 얼굴, 누군가 커터칼로 장난질을 해놓은듯 상처가 많은 얼굴. 반항하고 폭력적인 루벤에게 구애받지 않고 그를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서서히 루벤을 굴복시켜가는 마리에게 루벤은 매력을 느낀다. 마리가 루벤에게 처음으로 읽어주는 책은 안데르센의 눈의여왕.
악마가 특별한 거울을 만들었어요. 아름다운 것은 모조리 흉칙하게 보이게 하고 착한 것은 보이지 않게 하고 쓸모없고 못생긴 것은 더욱 선명히 보이는 거울이었어요.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더럽고 괴상해 보였으며 착한 사람의 얼굴은 심하게 찌그러져 보였지요. 하늘에 올라간 악마들이 그만 거울을 놓쳐버렸어요. 거울은 수천 수억만개 조각으로 부서져 비처럼 내렸습니다.
큰 도시에 두 아이가 살았습니다. 친남매는 아니지만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남자아이는 카이, 여자아이는 게르다였습니다. 어느 겨울 눈이 내렸습니다. '저건 흰 벌들이 날아다니는 거란다' 할머니가 말했어요. '그럼 여왕벌도 있나요?' 카이가 물었죠. '그렇단다. 눈의 여왕이지. 눈의 여왕은 이곳저곳 늦게까지 날아다니며 창문을 들여다본단다. 그럼 창문이 얼고 신비한 무늬가 생기지'
'아야! 뭔가 내 심장을 찔렀어' 악마의 거울 조각이 카이의 심장에 박혔고, 카이의 심장은 얼음처럼 차가와졌습니다. '왜 웃는 거니?' 카이가 투덜댔습니다. '정말 못생겼군, 게르다. 못생겼어 흉칙해 미워 괴물같애' 그순간 눈의 여왕의 차가운 입술이 카이의 이마에 닿았습니다. 얼어붙은 카이의 마음은 모든 추억을 잊고말았습니다. 눈의 여왕의 키스로 카이는 게르다에 대한 기억을 잊었습니다.
책을 읽어주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보이지도 않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실제로 눈이 내리는양 두 손을 벌려 눈을 잡으려고 하는 순수한 루벤의 또 다른 모습에 마리도 어느새 마음의 벽을 허물어간다. 그리고 서로는 사랑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리고 책을 좋아라하는 마리가 책장에서 책을 꺼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책의 냄새를 맡는 장면. 손으로 책장을 더듬고 책의 질감을 느끼고 그 냄새를 맡아 좋아하는 책을 고르고, 그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 루벤의 모습이 좋았다. 자신에게는 만지는 것이 보는 것이라며 마리를 더듬던 루벤이 마리의 상처들을 더듬으며 얼음꽃같다고 말한다. 루벤의 상상속에서 회색 숲을 뛰어가는 하얀 피부 빨간 머리, 빨간 입술의 아름다운 마리, 루벤은 너무 행복하다. 상처투성이 마리도 루벤으로 인해 웃을 수 있게 된다.
루벤이 시력을 되찾는 수술을 한다는 소식에 루벤을 떠나고자 결심한 마리, 바람부는 창가에서 커튼 사이로 안타깝게 서로를 응시하고 만지는 두 연인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 수술을 통해 시력을 되찾았지만 마리가 자신에게서 떠난 것을 알고 방황하는 루벤이 우연히 창녀촌을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그녀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마리처럼 읽어주는 여자는 없다.
무엇으로도 위안받지 못하는 루벤은 추억을 찾아 도서관에 들러 안데르센 동화집을 찾는다. 책장정리를 하는 마리를 보지만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에게 책을 찾아달라고 하는데, 책을 건네주는 마리의 상처투성이 얼굴을 보고 흠칫하고 놀란다. 그런 모습에 마리는 또 상처입는다. 책을 건네고 돌아서는 마리에게서 사랑하는 여자의 냄새를 맡은 루벤이 고개를 서서히 돌린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얼음뿐인 궁전에서 카이는 얼어붙은 사람 같았습니다. 카이를 찾아온 게르다는 카이를 꼭 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뜨거운 눈물은 카이의 가슴에 떨어져 차가운 얼음을 녹였고, 게르다가 카이의 손과 볼에 입을 맞추자 카이의 혈색이 돌아오고 거울 조각도 흘러나왔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오라는 루벤에게 네가 사랑했던 마리가 이런 모습이었냐고 물어보는 마리. 처음으로 두눈이 마주친 두사람. 그리고 도망치듯 멀어지는 마리. 상처투성이 얼굴과 그만큼의 상처를 가슴에 간직한 마리가 사람들의 눈을 싫어했다는 것, 루벤에게만큼은 언제까지고 아름다운 마리이고 싶어서 떠난 것을 안 루벤은 흰눈이 쌓인 정원으로 나간다. 두개의 고드름을 양손에 쥔 루벤, 서서히 고개를 숙인다...마지막 장면에서 눈에 붕대를 감고 정원에 앉아있는 루벤, 그의 마음속 정원에서 백발이고 상처투성이 얼굴이지만 행복한 모습의 마리가 해맑게 웃으며 뛰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