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게보르크 바흐만, 삼십세
어떠한 기회에 부딪쳐도 그는 긍정했던 것이다. 우정에도, 사랑에도, 무리한 요구에도. 하지만 이 모두는 항상 일종의 실험이었으며 또한 몇번이고 거듭될수 있는 것이었다. 그에겐 세계라는 것이 취소 가능한 것으로 보였고, 자기 자신까지 취소가 가능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는 지금처럼 자신에게 삼십세가 되는 해의 막이 오르리라고는, 판에 박힌 문구가 자신에게도 적용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또한 어느날엔가는 자신도 무엇을 진정 생각하고, 무엇을 진정 할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로 중요한게 무엇인가를 고백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한순간도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 천한 가지의 가능성 중 천의 가능성은 이미 사라지고 시기를 놓쳤다는- 혹은 자기 것이라고 할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뿐이고 나머지 천은 놓칠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제껏 한번도 의혹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 이제껏 무엇하나 겁내본 적이 없었다. 지금에야 그는 자신도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 주변을 에워싼 인간들에게 결별을 고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새로운 인간들에게도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 수가 없다. 인간들은 그를 마비시키고 그들 나름대로 자기네에게 유리하게만 그를 해석했다. 얼마동안 한 장소에서 살다보면 사람들은 너무나 여러 모습으로, 소문속의 모습으로 배회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주장할 권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만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뿐만 아니라 영원히 홀로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놓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여기서는, 그가 오래 전부터 붙박고 살아왔던 이곳에서는 그러한 생활을 시작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라면 시도해볼 수 있으리라.
그는 몰과 재회했다. 항상 그가 도와주어야만 했던 몰. 그렇지 않으면 인간을 의심하던 몰. 오래 전, 그가 자기의 돈을 몽땅 빌려주었던 몰. 그와 더불어 그녀를 알고 지낸 몰… 지금은 행복에 잠겨있는 몰은 그에게 돈을 갚지 않는다. 따라서 그 때문에 만나는 것이 거북스럽고 약간 모욕을 당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당시 몰은 도움이 절박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는 몰을 여러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모든 문을 열어주었다. 바로 몰이 그 사이에 도처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그럴듯하게 조제된 하찮은 뜬소문과 주워 모아 조금씩 위조한 험담으로 그를 악평 속에 몰아넣었다. 몰은 날마다 전화를 걸고 그가 가는 곳마다 나타났다. 몰은 그를 보살펴주면서 그의 입에서 고백을 긁어내어 그것을 닥치는대로 만나는 이에게 전파했다. 그러고도 그의 친구임을 늘 자처했다. 몰이 없는 곳에는 몰의 그림자가 있다. 그것은 물론 사념과 환상속에 머무는 것이지만, 한층 거대하고 위협적이다. 끝이 없는 몰. 몰의 위협, 하지만 몰 자신은 그림자보다도 한결 작은 존재로서, 자신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랍고도 교묘하게 보복을 하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의 몰에 대해 그는 거듭 대비해야 하리라. 그는 여기저기에 이들 숱한 몰을 너무나 많이 알고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야 비로소 그는 이 단 한사람의 몰에게 부딪힘으로 해서, 세상에는 몰이 단 한사람뿐이 아님을 이해하게 되었다.
파국이 진행되고 있다. 만약 이 해(年)가 나를 파멸속에 몰아넣지만 않는다면 나는 행운아라고 말할수 있으리라. 나 자신의 파국을 바라보는 이 순간, 나는 바로 그 자체가 인생이라고도 할수 있는 무시무시한 상심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해줄수 있는 것은 죽음뿐임에도,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8월! 찌는 듯한 나날이었다. 대장간에서 달구어진 쇠붙이 같은 나날. 시간은 신음했다. 여름이 이렇듯 스스로를 낭비하는데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곧 가을이 온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8월은 공포로 가득했다. 손을 내밀어 잡으라고, 순간적으로 살라고 하는 강요에 가득차 있었다.
금빛의 9월. 타인이 나에 대해 품고 있는 모든 환상을 털어내버린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구름이 저처럼 흐르는 것이라면 나는 대체 누구일까!
내 육신에 기거하고 있는 정신은 그것의 거짓 주인보다 한결 위대한 사기꾼이다. 정신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일을 나는 무엇보다 두려워하지 않을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 어느 것이나 나 자신과 상관없기 때문이다. 개개의 사상이란 한결같이 낯선 데서 얻어 온 씨앗이 발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감동시킨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나는 생각할 능력이 없다. 그런가 하면 감동하지도 않았던 류의 사물들에 관해서나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온갖 무의식적인 반응과 단련된 의지로 이루어진 한 다발의 묶음인 나. 충동과 본능의 부스러기와 역사의 찌꺼기에 의해 길러지는 나. 한 발을 황야에 두고 다른 한 발로는 영원한 문명의 중심가를 밟고 있는 나. 도저히 관통할 수 없는 나. 각종 소재가 혼합되어 머리칼처럼 뒤엉켜 풀수 없는, 그런데도 뒤통수의 일격으로 영원히 소멸되어 버릴수도 있는 나. 침묵으로부터 생성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나… 왜 나는 이 한여름 내내 도취 속에서 파괴를 추구해왔던가. 아니면 도취 속에서 승화를 갈구해왔던가- 그것도 나 자신이 하나의 버림받은 악기였음을, 벌써 오래 전에 누구인가 몇개의 음을 튕겨본 적이 있을 뿐인 버림받은 악기였음을 스스로 외면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그 음을 어쩔줄 몰라하며 변주하고, 분노에 떨며 나의 흔적을 지닌 한 가락의 음을 만들어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나의 흔적이라니! 흡사 그 무엇이든 간에 나의 흔적을 지니는 것이 무슨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얼마든지 신념을 가져라! 하지만 그대들의 쩔렁거리는 그 동전은 이미 유통되지 않는데도, 그대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는구나.
그리스나 붓다의 시대는 이미 끝났음을, 계몽주의나 연금술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음을 인정하라. 그대들은 그대들의 연장자들에 의해 가구가 배치된 나라에 사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들의 의견은 빌려온 것이며 그대들 세계의 형상도 임차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그대들이 그대들의 생명을 걸고 참된 지불을 하는 마당에서도 이미 잠긴 빗장 저편에서 지불하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불현듯 그에겐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이용할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만족의 상태에 있으려면 그는 어떠한 정해진 일도 해서는 안 되었고, 생(生)에 머물기 위해서는 아무런 소망이나 욕구도 충족시켜서는 안 되었다. 이 퇴장의 해(年)의 특징이라면 빛을 아끼는 일이었다. 화창하게 밝은 날에도 잿빛이 실려 있었다.
지금껏 그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타인들과 어울려 허비했다. 그리고 이제와서 그는 시간을 이용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자기 편으로 구부려놓고는 시간의 향내를 맡았다. 그는 시간을 즐기게 된 것이다. 시간의 맛은 순수하고 좋았다. 그는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몰입하고 싶었다.
오늘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는 혼자인채로 기분이 유쾌하다. 그래서 아무것도 탐내지 않으며 소망의 건물을 허물고 희망을 포기하고는 날로 단순해져갔다. 그는 이 세상에 대해 겸허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떠나오기 전에 그는 머뭇거리면서, 피로한 나머지 허전한 기분으로 그녀를 껴안았다. 그는 아주 예의바르게 행동을 했던 것이다. 층계참에서 뒤를 돌아보고 마치 돌아가기가 힘들다는듯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위선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삐딱하게 생기를 잃은 표정으로 그를 서둘러 몰아내었다. 밖에서는 하루가, 혹은 사람들이 하루라고 부르는 것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이 밤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이 밤은 이제 겨우 시작이고 어쩌면 끝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마라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근육이 없는 언어, 이 아무런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언어에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말투, 음성에 주름을 잡고 노래하듯 말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약함을 연출해 상대방의 팔을 느닷없이 움켜잡고 애무를 강요했다. 어린애 노릇을 하며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반면, 그 목적을 위해 상대방을 확대시키는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의 한때를 기억하고 비로소 나는 사태를 통찰할 수 있었다.
왜 거짓말은 좋지 않은가. 거짓말은 연쇄적인 거짓말을 낳을 수 있다. 진실은 그럴 가능성이 없는가. 그리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세계에 혼란을 가져온다. 진실은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는가? 진실은 고작 진실일 뿐이다. 우리는 왜 진실을 다시한번 언어로 확인해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도대체 이 터무니없는 진실을 선택해야만 하는가. 거짓말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사실 거짓말 역시 인간의 산물이며 진실로 오로지 인간의 산물의 반쪽이다. 왜냐하면 거짓에도 진실에 일치하는 어떤 것이 틀림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앞서 무엇이 존재해야 한다. 독자적인 진실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진실만이 유일하게 진실하다는 생각은 잘못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