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액션, 스릴러, 호러가 아니면 영화를 다운받지 않았다. 받아놓고 보지 않은 영화가 어찌나 많은지 감당이 안되니까. 영화를 보려고 해도 느린 템포로 시작하는 음악만 들어도 딱 보기가 싫어진다. 근데 왠일, 어떤 날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진작에 다운받아 놨던걸 오늘 봤다. 어제는 윤선씨, 은경선배와 여의도 다미에서 술한잔 걸치고 늦잠을 잤는데, 자고 일어나 좀 적적했다.
2008년작. 기예르모 아리아가 감독(별다른 작품 리스트가 없는 감독이다.)
샤를리즈 테론, 킴 베신저, 제니퍼 로렌스 주연.
사는게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인간이란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존재인지 슬프게 공감이 되는 영화였다. 엄마의 슬픔은 엄마만 알겠지만, 딸은 그런 엄마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엄마가 외간 남자와 바람피우는 트레일러에 자기도 모르게 불을 지르는 딸, "엄마, 이제 나와.. 나와.. 제발 나와.."라고 하지만 급작스럽게 번진 불길은 트레일러를 순식간에 태워버린다. 한쪽에선 사랑하는 아빠를 잃고 방황하는 아들이 있다. 아빠의 흔적을 찾아 불탄 트레일러 주변을 맴돌고, 아빠와 바람을 피우다 같이 죽은 여자의 장례식을 배회하는 아들. 그리고 엄마가 사랑했던 유부남의 아들과 만나는 딸. "너는 너희 아빠랑 많이 닮았니?" 슬픔에 대한 이해는 서로 사랑하는 감정으로까지 발전한다. 같은 상처를 가져선가. 두 사람은 함께 있음으로 인해 방황을 끝내는 느낌이다. 하지만 두 불륜남녀의 자식들이 만나는 걸 좋게 봐줄 사람은 없다. 두 사람은 멕시코로 도망치고, 딸은 엄마의 남자의 아들의 딸을 낳는다. 어떻게 시작되었던지 그 관계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남자의 아들과 자신의 상처나 슬픔이 딸에게도 전염될까봐 아이를 낳고 도망치는 여자의 딸.
영화는 12년 뒤 그 딸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유부남과 함께 일어난 아침,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그녀에겐 추파를 던지는 손님들이 종종 있는데,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들과 잠자리를 한다. 아무 감정없는 씁쓸한 정사신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건 자해다. 직장에선 종종 담배를 피우겠다고 나가선 혼자 바위에 앉아 날카로운 돌멩이로 허벅지에 상처를 남긴다. 내가 미워 죽겠다는듯이. 혼자서 딸아이를 키워온 남자가 사고로 입원하던 날, 남자는 친구에게 그녀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그녀가 12년만에 딸아이를 만나는 순간이 아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남자의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간 여자가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남자를 숨죽여 바라보다가 낮은 음성으로 "당신이 없으면 난 어떻게?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라며 울먹이는 장면이다. 떨어져 있어도 그들은 늘 함께였구나 싶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에게 이 남자는 뿌리였구나 하는 것이 가슴이 확 와닿았다. 변변찮은 연애과정 하나 보여주지 않았건만 이 장면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답안지 같았다. 그리고 남자가 깨어난다. 병실에 들어가도 좋다는 의사의 말에 뛰어가는 딸아이. 남자의 병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딸이 그녀를 돌아보며 말한다. "are you comming?" 외로움을 설명하거나 포장하지 않으려고 해서, 너무나 담백하게 슬퍼서 좋은 영화였다.
* 53년생인 킴 베신저는 너무나 아름답게 늙어서 보기 좋았고, 75년생으로 영화 몬스터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샤를리즈 테론은 이 영화에서 온몸으로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놀라운 열정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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