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서

안똔 체호프 단편, 어느 여인의 이야기

guno 2015. 1. 16. 08:17

 

 

출발할 때는 날씨가 좋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성난 검은 구름이 다가왔고, 우리는 검은 구름 쪽으로 가고 있었다. 검은 구름을 배경으로 우리 집과 교회가 하얗게 보였다. 키가 큰 미루나무가 은빛으로 빛났고, 건초와 비 냄새가 났다. 호밀과 귀리가 자라는 들판에 잔물결이 일다가 갑자기 돌풍이 불어 흙먼지가 소용돌이쳤다. 말을 타고 나란히 가고 있는 세르게이치는 기분좋게 웃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좋아!” 그가 소리를 질렀다. “너무 좋아!” 그의 유쾌함에 전염된 나는, 순식간에 온몸이 흠뻑 젖고 벼락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웃기 시작했다.

우리가 마당에 들어섰을때 바람은 이미 멎었고, 커다란 빗방울이 풀잎과 지붕 위로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마구간 근처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세르게이치는 말의 재갈을 벗기고 말을 마구간의 칸막이 안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그를 기다리며 문간에 서서 비스듬히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세르게이치가 다가왔다. 빠르게 말을 달린 탓에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황홀하고 간절해 보였고 얼굴은 창백했다. 그의 콧수염과 턱수염에서 반짝거리는 빗방울들도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듯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이 내 아내가 될수 없다는건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요. 대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만 당신이 알아주시면 됩니다. 당신이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앞으로도 계속 바라볼수 있게 해주세요.” 그의 희열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나는 그의 도취된 얼굴을 바라보며, 빗소리와 뒤섞인 그의 말소리를 들으며 홀린듯 몸을 움직일수 없었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흐뭇한 웃음을 터뜨리고 퍼붓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뛰어갔다. 그도 웃으면서 물웅덩이를 뛰어넘으며 나를 따라 달렸다.

잠자리를 준비하면서 나는 촛불을 밝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알수 없는 감정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으며 생각했다. 내가 세르게이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그렇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릴수 없었다. 사실 나는 자유롭고 건강하며 부유한 명문가 출신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얻을수 있지만 그는 가난하고 게다가 귀족도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에는 충분치 않다. 

 

아침이 되었다. 따뜻한 햇살이 나를 감싸고 보리수나무 가지의 그림자가 침대 위로 너울거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시간은 흘렀고 여름이 지나자 우리 가족은 도시로 돌아갔다. 세르게이치가 가끔 방문했지만 그뿐이었다. 시골에서 사귄 사람은 시골에서만, 그것도 여름에만 매력적인 법이다. 겨울의 도시에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프록코트를 빌려 입은 것마냥 어색하다. 세르게이치는 이따금 예전같은 시선을 보내고 사랑을 속삭였지만 그 결과는 시골에서와 전혀 달랐다. 도시에서는 우리 사이에 놓인 벽을 더 절실히 느꼈다. 물론 세상에 부술수 없는 벽이란 없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들은 내가 아는한 너무 소심하고 생기가 없고 게으르고 걱정이 많다. 그리고 지나치게 쉽게, 자신이 실패자라는 생각, 생활이 자신을 속인다는 생각과 타협한다. 투쟁하는 대신, 그들은 세상이 저속하다고 비판만 할 뿐이다. 그들의 비판 자체도 조금씩 그 저속함 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모른채.

나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행복은 가까이 있었다. 행복이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는 듯했다. 나는 나 자신을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내가 인생에서 뭘 기다리고 바라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마음 편히 살았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의 곁을 스쳐 지나갔고, 밝은 낮들과 따뜻한 밤들이 어른거리며 지나갔고, 꾀꼬리가 노래를 불렀고 건초 냄새가 났다. 기억 속에서는 사랑스럽고 멋진 이 모든 것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나에게도 흔적도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안개처럼 아무런 가치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것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이가 들었다. 한때 좋아했고 즐거움과 희망을 가져다주었던 그 모든 것들, 빗소리, 천둥소리, 행복에 대한 생각들, 사랑에 관한 대화들, 이 모든 것들이 오직 기억으로만 남아, 나의 앞에는 단조롭고 황량한 먼 길만 보인다. 그 위에는 인기척도 없고, 저 멀리 지평선은 무섭도록 어둡다.

초인종이 울렸다. 세르게이치가 왔다. 변함없이 내 곁을 지키는 그는 더 마르고 늙었다. 더이상 내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고 허튼 소리도 하지 않는다. 무슨 일에도 손만 내저으며 마지못해 살고 있다. 지금도 벽난로 옆에 앉아 말없이 불빛만 바라보고 있다. 옛일이 떠오른다. 겨울나무를 바라보며 여름동안 그 나무가 나를 위해 얼마나 푸르렀는가를 떠올린다. 나는 더이상 내가 부유한 명문가 출신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갑자기 어깨가 흔들리고, 나는 고개를 숙인채 씁쓸한 울음을 터뜨린다. 이제는 돌이킬수 없는 지난 일들을 간절하게 바란다. '내 인생은 망가졌어!' 이제서야 나는 내가 인생을 헛되이 보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앉아만 있다. 나에게 울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울 필요가 있으며 그럴 때가 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를 배웅할 때 현관에서 그는 일부러 느리게 털외투를 입는다. 아무 말없이 두번 나의 손에 입을 맞추고 오랫동안 눈물에 젖은 내 얼굴을 바라본다. 이 순간 그는 뇌우, 빗줄기, 우리의 웃음, 당시의 내 얼굴을 떠올렸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나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한다. 그는 기꺼이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흔들며 내 손을 꼭 잡는다. 안녕히 가시길!

그를 떠나보내고 나는 서재로 돌아와 다시 벽난로 옆에 앉는다. 재가 덮인 붉은 목탄이 꺼져가고 있다. 추위가 점점더 사납게 창문을 두드리고, 바람이 벽난로 굴뚝에서 애처롭게 울부짖는다. 하녀가 들어온다. 내가 자는줄 알고 소리내어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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