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재발견, 백야행

guno 2010. 2. 21. 06:54

 

 

 

매일 지나는 길도 어느 날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걸 새삼 느낄 때도 있다. 백야행을 읽으며 그랬다. 지금껏 히가시노 게이고를 몰랐구나. <용의자 X의 헌신>, <악의>, <옛날에 내가 죽은 집>, <예지몽>, <변신>, <11문자 살인사건> 등 읽은 책이 한두 권이 아닌데, 백야행은 전혀 달랐다. 백야행을 읽기 전까지 히가시노 게이고는 재밌게 글쓰는 작가였다면 백야행을 읽은 후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게 최고의 작가가 됐다. 아직도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가슴 벅찼던 기분을 잊지 못한다.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책을 읽은 후 일본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도 봤는데(야마다 타카유키, 아야세 하루카 주연) 간지나게 하려다 과하게 힘이 들어가버린, 답답한 연출이라 실망스러웠다. 예쁜 얼굴에 비해 연기력이 떨어지는 아야세 하루카, 부수적인 부분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중요한 감정선이 흐트러져버린 드라마였다. 영상화하기에는 벅찬 스토리임에 분명하다. 근데 스토리가 중요한게 아니다. 백야행은 감정선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관계를 이어가는 감정, 미묘한 심리. 그걸 표현하기에 영상매체는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고수와 손예진 주연으로 한국에서도 영화로 만들었다. 별 기대 안하려고 하는데, 평론이 나쁘지 않다. 영화를 본 뒤 감상평을 여기에 추가로 남기려고 한다.

 

드디어 영화를 봤다. 오 마이 갓. 어찌나 떨리던지.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실수해서 작품을 망칠까봐 두근두근 손에 땀을 쥐어가며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가 끝나고 나도모르게 박수를 쳤다. 박신우 감독, 훌륭하게 해냈다. 쉽지 않은 내용을 멋지게 서머리했다. 고수와 손예진은 환상적인 연기력으로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두 남녀를 너무나 잘 연기했다. 이렇게 멋질 수가.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라면 무척이나 맘에 들어했을만한 영화다. 소설과 다른 점이 몇가지 있는데, 오히려 영화적 스토리로 담아내는 데 훌륭한 역할을 했다. 우선 한석규가 열연한 형사의 경우 소설에서는 밑도끝도 없이 두 사람에게 집착하는게 이해할 수 없다면, 자신의 아이를 수사도중 잃는 설정은 매우 훌륭했다. 손예진이 결혼하는 재벌에게 다큰 아이가 있고 나이가 어느 정도 있다는 설정도 매우 현실적이라 마음에 든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어린시절 두 아이의 접점이 더 나왔더라면. 손예진의 어린시절 자신을 보살펴줄 고모가 있다는 것을 알고 착착 준비를 거쳐 엄마를 살해한 것, 두 아이가 도서관에서 책을 교환해 읽으며 소통하는 것 등을 좀더 보여줬어야 고수가 가위로 아빠를 죽이게 되는 과정이 더 설득되었을 것이다. 고수가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것도 너무 짧게 지나가 뭐가 뭔지 모르게됐다. 마지막에 산타 복장으로 형사들을 따돌린 것도, 엄마의 까페에서 서빙을 하며 애인 노릇을 하는 남자도 고수의 호스트바 친구들인데 설명해주는 장면이 삭제되어 버리는 바람에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까페 여사장과 섹스 후 사정하지 않는 것도 왠지 설명이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자와 관계하지 못하는 고수의 섹스는 불구의 섹스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나타내는 게 사정하지 못하는 섹스인데, 고수의 방황을 좀더 보여줬어도 좋았을 걸.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생생히 살아있는 감정선이며, 마지막 장면에서 한석규가 고수에게 너를 일찍 잡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장면, 죽은 고수를 뒤로 하고 밝은 곳으로 올라가는 손예진, 그녀가 고수에게 다가가는 걸 저지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가는 남자의 딸이 손예진의 어린시절 모습과 중복되는 장면은 그야말로 제대로된 연출이라 칭찬해줄밖에. 와우, 백야행을 사랑하는 독자에게 이 영화는 매우 멋진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