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자 노트

그리운 감은사탑

guno 2012. 8. 11. 11:02

 

 

 

2001년 여름, 원고마감을 끝내고 경주를 향했다. 수학여행으로 와본 적이 있지만 그땐 이리저리 몰려다니느라 제대로된 감상을 못한 듯 했다. 인터넷으로 숙소도 알아보고 촘촘히 일정도 짜도 대중교통 노선과 시간도 수첩 가득 체크해서 기차에 올랐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혼자 여행온 느낌을 즐길 수 없었던 불국사를 서둘러 둘러본 뒤 석굴암 근처, 예약해놓은 숙소에 몸을 풀었다. 고된 마감 후라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마실 생각에 더 이상 일정을 소화하기 싫기도 했다. 일제시대 지어졌다는 숙소는 미닫이문과 시멘트로 발라놓은 네모난 욕조가 무척이나 깔끔한 곳이었다. 창밖으로 토함산이 보이고 하얀 안개가 산등성이는 물론 산 아래까지 휘감아 신비로운 기분까지 느끼게 하는 저녁나절, 찬물샤워후 머리카락도 말리지 않은채 반바지에 쪼리를 신고 여인숙 옆 구멍가게에서 맥주를 사는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일찍 여인숙을 나서 석굴암을 향했다. 관광버스가 바로 앞까지 간다지만 왠지 두 다리를 믿고 운동좀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보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무리였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매미소리를 들으며 땀을 비오듯 쏟아내고 올라갔지만 도보길은 그것을 감내할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경사가 70도는 되지 싶은 무지막지한 오르막길이 잔인하게 펼쳐졌다. 겨우겨우 올라 석굴암 입구 앞에 널브러져 아이스바를 먹고 있는데 거대한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관광버스들이 신나게 올라왔다. 산뜻한 얼굴을 한 관광객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걸 보고 아침인데 벌써 온몸이 땀에 젖은 나는 걸어온게 후회됐다.

얼추 몸을 추스리고 석굴암을 향해 걸어갔다. 입구에서부터 또 한참을 들어가야 석굴암에 도착하는데 관광객이 너무 많다보니 4열횡대로 행진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도 감동의 석굴암은 대단했다! 사람의 것이 아닌듯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듯한, 내가 함부로 보아서는 안될 듯한 경외감이 느껴졌다. 사람들에 떠밀려 금세 둘러보고 나와야 했지만 그렇게 한번 쓱 둘러보고 나오긴 싫었다.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을 모두 물러나게 하고 그 앞에 의자 하나 놓고 앉아 하루종일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다음에 올땐 사람들이 가장 적을 때가 언젠지 알아보고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석굴암에서 내려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감은사탑으로 가려 했는데 시간이 촉박했다. 버스 시간을 놓치면 다음 버스는 또 한참 뒤에 온다는 말에 빵 하나 사들고 버스에 올랐다. 등에 배낭을 맨 채 버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며 빵을 먹는데 닭을 잡아 장에 내다 파시려는지 옆자리 할머니가 바닥에 내려놓은 닭장속 닭들이 푸덕거리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영화속 한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감은사탑 가는 정류장에 내렸다. 감은사탑으로 향했다. 큰길에서 조금 올라가니 바로 감은사탑이 보였다. 미칠 것 같았다. 너무 크고 웅장해서 시커먼 거인처럼 우뚝 서있는 그것은 첫눈에 사람을 압도하는 무엇이 있었다. 보는 순간 주위의 모든 것을 물리치고 그것과 나만 둘이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 아 이래서 유홍준은 '아! 감은사탑이여' 했던 거구나. 눈물이 났다. 이렇게 먼곳에, 여기에 네가 있었구나. 운명같은 사랑을 만난 것처럼 반갑게 손을 내밀고 싶어졌다. 할 수 있다면 포옹을 하고 싶었다. 8월의 변덕스런 구름이 해를 가렸다 비켜갔다 하는 동안 감은사탑은 표정을 달리 하며 나를 응시했다. 정말 멋진 탑이다. 

감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나를 마법에서 깨우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도착했다. 소음과 함께 카메라 후레쉬도 정신없이 터졌다. 감은사탑 또한 언제 그랬냐는듯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거기서 발길을 돌렸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관광버스가 주차하는 공터를 벗어나 수확을 앞둔 황금빛 벌판, 논두렁을 양쪽에 끼고 반듯하게 나있는 까만색 포장도로 위를 한참동안 걸었다. 내려서는 금방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멀리 있을까 이상하기만 했다. 잘하면 길위에서 익겠다 싶을만큼 더웠다. 감은사탑의 소음이 어쨌냐는듯 사람 하나 없는 길에는 정적이 감돌았고 시끄러운 매미소리와 시뻘건 꼬리의 고추잠자리들만이 호기심 가득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경주란 참 묘하군. 순식간에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잖아. 감탄스럽기도 했다. 겨우겨우 도착한 버스정류장. 터미널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다시 오리라, 다시 와서 너를 보리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