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자 노트

>>이동포차의 추억

guno 2013. 11. 29. 11:32

 

 

그녀와는 일 때문에 만났다. 전부터 그녀와 일해보고 싶었는데 마땅한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러던중 같이 일해볼 기회가 생겼고,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내 섭외전화를 하려고 했을때 주변에서 내게 해준 말은 이랬다. 일은 잘하는데 사람이 영 불편해. 너무 까다로워서 짜증날 때가 많으니까 감안해야 할거야. 만나는 것도 싫어하고 연락 자주하는 것도 되게 싫어해. 심지어 처음 일하는건데 메일로 내용을 보내보라고 해서 욱했었거든. 니 성격에 맞을지 모르겠다.. 글은 말랑말랑하게 쓰면서 성격은 꽤 뾰족한가보다 싶었다. 전화를 해서 어쩌저쩌해서 같이 일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녀가 대뜸 물었다. 점심에 뭐해요? 글쎄요. 약속은 없는데. 그럼 나랑 약속하면 되겠네. 인사동에 보고싶은 전시가 있어서 점심때 나갈거니까 거기서 봐요. 거기 부채랑 이것저것 내놓고 파는 가게 알아요? 글쎄요.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어딜 말씀하시는지는 알겠는데요. 그럼 거기서 만나요. 1시. 근데 어떻게 생겼어요? 글쎄요. 멍청하게? ㅋㅋㅋ 나는 칠랄레팔랄레하게 생겼어요. 그럼 좀 있다 봐요. 

인사동에 좀 일찍 도착했다. 그녀가 말한 가게 앞에서 기다리는데 한눈에 그녀를 알아봤다. 하얀 블라우스에 하늘하늘 긴 치마, 하얀 캔버스 운동화, 손으로 만든 천가방을 들고 하얀 손뜨개 챙모자를 눌러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목장소녀 하이디. 진짜 칠랄레팔랄레하군. 그녀도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리고 대뜸 내 손을 잡았다. 이건 뭐지? 놀랄 틈도 없었다. 전시장은 저기, 하고는 나를 이끌고 앞장섰다. 애인이 아닌이상 가족은 물론 친구와도 스킨십을 안한다고 말할 틈이 없었다. 배고파요? 전시 보고 먹어도 괜찮죠? 근데 몇살? 배는 고프지만 전시 보고 먹어도 될것 같고, 나이는 제가 한살 어린 걸로 아는데. 그렇구나. 그녀는 전시장에 들어가서야 내 손을 놓았고, 우리는 거의 10분을 말없이 그림 구경만 했다. 전시장를 나와 그녀가 이끄는대로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고 후식으로 나오는 차를 마셨다. 그녀는 매우 유쾌했고 내가 제안한 일에 대해서도 아주 쉽게 오케이를 했다. 까다롭다더니 아니시네요. 사람 만나는거 싫어하신다고 들었는데. 응, 자기 목소리가 맘에 들었어. 그래서 보고 싶더라. 제가 목소리 덕을 좀 보는 편이죠. 나 사람 만나는거 싫어하는거 맞아. 나한테 일을 의뢰하는 사람들을 좀 괴롭히는 편이지. 근데 전화기 목소리에도 표정이 있거든. 어떤 목소리는 내가 일줄게, 하는 권위의식이 느껴져서 재수없고 또 어떤 사람은 저희랑 일해주세요 하면서 비굴해지는게 재수없거든. 근데 자기는 괜찮았어. 점심때 같이 밥먹고 전시를 봐도 좋겠다 싶은 목소리였거든.

 

그녀와 함께 일을 끝내고 책이 나왔으니 보내줄게요 하고 문자했더니 그녀가 전화를 했다. 작업실 올래? 어딘데요? 남산. 그녀를 닮아 소박한 작업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면에 보이는 커다란 창문에서 하얀 광목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시장에서 몇마 끊어와서 그대로 봉에 걸어놓은듯, 마감이 안된 광목천이 칠랄레팔랄레했다. 근데 그게 화사하고 예뻐보였다. 창과 매우 잘 어울리는. 나무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생나무 책상위에 책과 종이와 연필들과 지우개똥이 즐비했다. 그 어느것도 옆으로 치우지 않고 그 사이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아주 편하게 말했다. 마셔. 네. 근데 자기 우리 말 놓자. 그럴까요? 언니라고 부르는거 싫어? 괜찮아요. 그럼 언니라고 불러. 네.

모르는 사람들과 쉽게 일을 할만큼 친근하게 시작하는건 나름 잘하지만 거기서 더 친해지는건 매우 어렵다. 친한척하는 사람이 백명이면 거기서 진짜 친한 사람은 서넛 정도나 될까. 잘모르는 사람이나 나보고 사교성 좋다고 하지, 알만한 사람들은 되게 까다롭다고 하는 난데, 그런 내게 그녀는 너무 쉽게 훅 들어왔다. 우리 술 마실까? 그럴까? 작업실을 나와 남산을 내려올 때만 해도 그녀가 어떤 술집을 찾아가려나 하고 궁금해하던 나는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고 어지간히 놀랐다. 편의점에서 술과 안주를 사서 비닐봉투를 들고 다시 남산을 올랐다. 그녀가 이끄는대로 갔다. 어느 한적한 돌계단을 오르자 노란 은행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공터 벤치가 나왔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나왔다. 너무 멋지다! 그렇지? 술은 이런데서 먹어야 제맛이지. 그녀는 술과 안주를 벤치위에 풀어놨고 우리는 종이컵을 홀짝거리며 서서히 취해갔다. 남산은 달도 휘영청 밝구나. 응, 그러니까 달도 보고 나도 보게 자주 와. 언니가 날 찾아와도 되지. 나 강남 싫어. 니가 와. 샛노란 은행나무가 동그랗게 감싼 작은 공터, 그 사이로 커다란 얼굴을 비추는 달과  오래된 돌바닥 위에 떨어진 은행잎들이 고즈넉한데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아늑한 벤치에서 나는 그때 술을 마시며 이 사람, 참 좋다 하고 생각했다.

우리의 우정은 뜨겁지 않지만 따뜻했다. 두세 달에 한번씩 만나 술을 마셨고, 은행나무 벤치에서의 술자리 이후에도 그녀는 매번 나를 즐겁게했다. 두번째 술 약속을 할 때였다. 전화로 약속을 잡는데 그녀는 ○○역 ○번 출구로 나와 몇번째 골목으로 들어와 두번째 편의점에서 보자고 했다. 그냥 술집 이름 알려주면 찾아갈게. 아니야. 그냥 와. 편의점까지 찾아가니 그녀가 하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테이블에는 이미 맥주와 땅콩이 놓여있었다. 뭐야, 여기서 먹는 거야? 응, 여기가 우리 목적지야. 혹시 노상에서 술먹는게 취미야? 응. 왜? 분위기 좋고 술맛 좋은 집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편의점이야? 편해서. 내가 편한 술집 많이 알아, 갈래? 아니, 난 술집이 싫어. 너무 과한 인테리어와 분위기도 싫고 너무 과한 안주들과 너무 과한 가격들이 싫어. 기사식당이나 포장마차 가면 되지. 그것도 싫어. 너무 밝아서 상대의 코털까지 보이는 형광등 불빛도 싫고 나를 밀치고 지나가는 술 취한 엉덩이들도 싫어. 분수에 맞지 않게 값비싼 포장마차는 더더욱 싫고. 그것도 분위기지, 술은 분위기로 마시는 거라고. 내가 분위기 나게 해줄게, 화내지마. 화가 난건 아닌데 이건 좀 당황스럽다. 

그랬다. 그녀와의 술자리는 늘 편의점 앞 파라솔 벤치거나 아니면 편의점에서 만나 술을 사서 천천히 걷다가 마땅한 곳에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는 식이었다. 나는 이걸 그녀의 이름을 따 ○○의 이동포차라 불렀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그녀가 지목한 편의점들은 늘 전망이 좋았다. 오래된 고택들 사이에 뻔뻔스럽게 자리잡은 24시 편의점들을 평소 싫어했던 나로서는 그 편의점 앞에서 바라보는 고택들과 오래된 골목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놀랐다. 재개발되기 이전 남산의 뒷골목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며 술을 마셨다. 언젠가 꼬불꼬불 골목길을 들어가 성곡미술관 근처 편의점까지 갔을 때는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는 편의점은 대체 어떻게 찾는거야? 그 편의점 벤치에서는 맞은편 집의 높다란 담벼락이 보였는데 곰팡이가 핀 오래된 돌담과 담밖으로 가지를 뻗친 나무가 너무나 근사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얏트호텔 뒷길 산책로에는 전망이 근사한 벤치들이 있고 또 야밤에 조깅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그녀 덕분에 알았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시립도서관 뒷편 돌계단에 앉거나 필동의 오래된 주택, 운치있는 남의집 대문 앞 계단에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시기도 했다. 다큰 여자 둘이 길거리에서 뭐하는 짓인가 싶겠지만 언니가 찾아내는 장소는 기가 막히게 멋진 전망과 한적함이 특징이라 민망함을 덜어주었다. 스무살 대딩도 아니고 편의점 술과 안주로 노상 음주를 하는건 불편한 점이 너무 많다, 하고 궁시렁거리던 나도 어느새 그녀에게 중독되어 여느 술집에 가면 지나치게 화려한 조명과 좌석과 음식들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어느날은 그녀가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무슨 날이야? 응, 니 생일. 나 오늘 생일 아닌데? 응, 근데 니 생일축하일이야. 무슨 말이야? 니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어. 근데 우리가 서로 생일 챙길 캐릭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이건 지났을지 모르고 아니면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니 생일을 축하하고픈 내 마음. 생일이 언제든 기억해. 내가 오늘 니 생일을 축하했다는 걸. 무지 고맙고 오래 기억날 생일축하네. 되게 고맙지? 그럼 사랑한다고 해봐.

 

그녀가 전부터 말해왔던 남자와 결혼한다고 했을때 좀 걱정이 됐다. 그 남자는 선명하지 못한 행동으로 언니를 많이 헷갈리게 했고, 연락이 없는 그 남자의 집에 찾아가 밤새 집앞에서 기다렸다는 언니의 이야기를 몇번 들었던 터라 맘이 놓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청혼을 받은 언니는 너무 행복해보였고, 친구들의 애정어린 조언이 상처가 될수도 있다는 걸 경험한 적 있는 나는 침묵으로 응원했다. 가고 싶지 않았던 건지 마감 때문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의 결혼식에는 가지 않았다. 신혼여행을 다녀와 일산에 살림을 차린 그녀는 남편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우리는 만났다. 술집에서. 처음이었다. 그녀가 말한 막걸리집에 들어서자 반갑게 손을 흔드는 그녀 옆에 개량한복을 입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지역활동가로 일한다더니 딱 그런 모습이었다. 요즘 활동가들에겐 개량한복이 유니폼인가봐. 왠지 마음에 가시가 돋았다. 나쁜 얼굴은 아니지만 사람을 많이 만나는 사람 특유의 유들유들함이 있었다.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 남자의 첫 질문이 매우 정치적이었다. 이 남자는 초면에 나랑 정치적 입장을 논하자는 건가?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데 언니에게 들은게 있다며 아는척을 했다. 그래.. 언니는 이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는 이야기를 했을테고, 그 이야기들 속에 이 남자의 마음에 꽂힌 그 무엇이 나의 정치적 입장이었던 거다. 근데 언니는 무슨 얘기들을 했을까. 우리가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 중에 무엇을 얼마만큼 말했을까.

 

(우리는 연인에게 많은 이야기를 한다. 특히 여자들은 연인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낭패를 보곤 한다. 전에 만났던 연인에게 내 가장 친한 친구와의 만남을 앞두고 그녀의 얘기를 한적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인생의 첫 술을 함께 했고, 연락이 뜸하고 만남이 적긴 해도 마음속 깊이 잘 통하는 이 친구는 가치관이 확실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안정적인 가정을 꾸미는게 목표였던 친구는 교대로 진학해 그 흔한 연애 한번 안하고 착실히 공부만 하다가 졸업하고 발령을 받는 것과 동시에 대기업 부설연구소 연구원과 결혼, 이제막 첫 아이를 임신했고 지금은 어느 학군에서 아이를 키워야 할지 물색중인 열혈주부라고. 이후 셋이 만났을때 나의 연인이 내 친구에게 보내는 곱지 않은 시선을 눈치채고 나는 너무 놀랐다. 나중에 그에게 물으니 그런 여자 정말 별로야,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뭘 보고 별로야? 결혼을 사회적 성공의 발판으로 삼는 여자. 헉, 내가 실수했다. 내 안에 친구에 대한 수많은 이해와 내용들이 있는데 그녀를 표현하기 위해 내가 입밖에 낸 말들은 적합하지 않았던 거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내 안의 반감이 표현된걸까. 아니면 미숙한 표현이 불러온 그냥 단순한 오해인가. 내 친구에게 그런 모습만 있는건 아니야 라고 설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십대 초반까지 매년 방학때마다 그녀와 내가 함께 시간을 보냈고 동네서점에서 우연히 만나 키득거리고 콘서트에 가서 소리를 지르고 함께 여행을 떠나 수다를 떨며 보낸 시간들이 있노라고, 내 설명이 잘못됐을지 몰라도 너에게 소개하는 이 사람은 내게 무척 소중한 친구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 구차했다. 내 연인에게 내 친구는 이미 규정되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설명하기 위해 내뱉는 말들은 상대를 이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때가 많다. 그러니 설명하는 사람도 설명을 듣는 사람도 신중해야 하고 섣불리 상대를 마음속 저울 위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형부라 불리는 그 남자는 나에 대한 선입견이 분명해 보였고, 나 또한 그에 대한 곱지 않은 인상을 저버릴수 없었다. 그 남자는 내게 호감형이 아니었고, 언니와 나누었던 얘기의 천분의 일도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냥 좋게좋게 슬쩍슬쩍 웃으며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남자는 지나치게 허물없이 다가왔다. 언니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내가 누구보다 잘 통할 거라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듯 했다. 별 관심도 없는 그 남자의 활동에 대해 오랜 시간 얘기를 들었다. 나는 점점 과묵해졌지만 언니는 내가 낯을 가린다고만 생각했다. 그녀는 더이상 나를 너무 잘 이해하는 언니가 아니었다. 나는 더이상 언제 어디서든 언니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술술 내 얘기를 털어놓던 동생이 아니었다. 왜 결혼을 안 하세요? 라는 남자의 질문에 글쎄요 라고 대답했는데 그때 언니가 그랬다. 얘는 나이든 남자를 좋아해. 어려서부터 아빠랑 사이가 안 좋았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너무 늙은 남자들이랑 만나서 나도 좀 놀랐어. 그 순간 말문이 막히고 너무 화가 났다. 나 이 남자랑 그런 얘기까지 해야 해? 언니랑 나누었던 모든 것들이 언니의 결혼과 동시에 형부와도 공유해야 하는 무엇이 된거야? 우리만의 방은 더이상 없는 거야? 남자는 내가 나이에 비해 성숙해서 어린 남자는 이성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고, 누구나 할법한 뻔한 소리를 했고, 나는 아예, 그런가요.. 하고 말끝을 흐렸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 그녀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이별을 서둘렀다. 이후 몇번 그녀와 약속을 잡고 만났으나 남자는 일이 없는 걸까, 아니면 두 사람은 떨어질수 없는 운명공동체가 된건가. 약속장소에 늘 함께 나타났다.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무장한 개량한복 남자는 언니와 꽤 잘사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덕분에 언니의 결혼 이후 한번도 이동포차는 운영되지 않았다. 나는 종종 그녀와 둘만의 시간을 그리워했으나 언니는 언젠가 내가 좋은 사람을 만나 넷이 함께 모이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했다. 그런가. 모든 관계는 변화하고 확장해야 하는 건가. 변치않고 이어지는 두 사람만의 우정은 가당치 않은 건가. 그동안 그녀에게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은 뭔가 부족한 거였을까.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도 연인과, 남편과 공유하지 않는 마음의 공간을 따로 둘수 있다는 생각은 나의 유아적 발상인가. 이후로도 몇번, 남자와 함께 만난 자리가 서둘러 끝이 나고 언니와 나는 점점 멀어졌다. 마지막 통화에서 남편의 지역활동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언니에게 급한 일이 생겼어. 미안, 나중에 통화하자 하고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집앞에 있는 은행나무가 눈부시게 빛나던 노란 잎들을 어느날 매섭게 털어내고는 마른 몸으로 쓸쓸히 눈을 맞고 있는걸 보고있자니 문득 그 은행나무 벤치가 떠올랐다. 마치 작은 연극무대처럼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비추던 행복했던 그곳. 그녀와 함께 거닐었던 남산의 구석구석, 그 오래되고 운치있던 동네에서 우리가 밤늦게 벌이곤 하던 이동포차의 추억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언니와 연락 안한지 4년이 넘었다. 연락이 없는건 잘살고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일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나의 우정은 당신을 향한 것이고, 그것은 아주 따뜻하고 견고한 방이다. 그러니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며 당신의 기대와 바램을 저버리는 옹졸함이 있더라도 제발 이해해주길. 하지만 언제든 당신이 찾아왔을때 문이 열릴 그 방을 나는 언제나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