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 江戶川亂步, 1894~1965
그는 일본 '추리소설'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히라이 타로(平井太郞)인데, 에도가와 란포라는 필명은 추리소설의 창시자인 미국의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en Poe)를 따서 일본식으로 바꾼 것. 란포의 소설은 추리와 공포, 그로테스크함과 에로티시즘이 결합되어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간 내면의 어두운 모습을 파헤쳐 숨막히는 공포를 이끌어내는 가운데, 절묘한 반전으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통쾌함까지 갖추고 있다. 란포는 1894년 미에현에서 태어났다. 나고야에서 중학을 졸업할 무렵, 집안이 파산해 한국으로 이주했다. 란포는 단신 고학을 결심, 본국으로 건너가 1921년 와세다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20년 단편 <이전동화>로 데뷔한 뒤 <심리시험>, <인간 의자>, <천장 위의 산책자> 등의 단편들과 <음수>, <고도의 마인> 등의 장편을 남겼다. 그가 창조한 탐정의 이름은 아케치 고고로(明智小五郞)인데, 그는 추리문학 역사상 하나의 획을 긋는 주목할 만한 캐릭터다. 영미에서 창조한 이전의 탐정들, 즉 셜록 홈즈나 오귀스트 뒤팽 등이 하나같이 '물리적인' 증거만을 중시하여 사건을 해결했던 것에 비해, 아케치 고고로는 '심리적인' 증거를 사건의 열쇠로 활용한다. 그런 점에서 란포의 소설은 트릭의 정교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제시될 수 있으나, 살인의 동기와 범행 이후의 심경 변화를 치밀하게 추적한 심리 묘사가 이를 충분히 커버하고 있다. 물리적인 증거와 심리적인 증거에 대한 란포의 입장은 아케치 고고로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설파되고 있다. "인간의 관찰이나 기억이란 정말 한심할 정도다. 물질적인 증거 따위는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 따라서 가장 좋은 추리법은 심리적으로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탐정 자신의 능력 문제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추리하는 인간이 인간을 어디까지 꿰뚫어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란포의 등장 이후, 일본의 추리소설은 서구의 추리소설을 모방하면서도 일본 특유의 정서로 융화시켜, 질적 수준에 있어서 영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발전해 갈 수 있었다. 1950년, 란포는 거금을 희사해 '에도가와 란포상(賞)'을 제정했는데, 현재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추리문학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일본 추리소설에 푹 빠져있는 내게 그의 이름은 매우 익숙하나 잘 모르는 작가였다. 어떻길래 일본 추리소설의 시조라 불리는 걸까 하다가 <음울한 짐승>이라는 단편집을 봤는데, 홋! 역시 대단했다. 게다가 무척이나 내 스타일이다. 인간의 음침하고 비뚤어진 욕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상상했었을 법한 그런 범죄가 잔뜩 등장한다. 다락방에 구멍을 내고 밤마다 다른 방을 염탐하며 돌아다니는 이야기, 방도 비좁은데 굳이 옷장에 들어가 좁은 공간에 갇히는 데 안도감을 느끼는 인간 유형은 무척이나 공감이 되어 읽는 내내 끼득끼득 웃음이 나왔다. 남들에게 얘기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내안에 꼬물꼬물 존재하고 있는 은밀한 욕망들이 있는데, 누군가 자기는 이런 놈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앗, 너도? 하며 박장대소하는 기분? 책을 읽는 동안 몇번이나 범인과 교감하는 경험을 해버렸다...돈많은 할머니를 죽이는 이야기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을 오마주했다는 생각에 반가웠고, 음침한 욕망과 노골적인 성묘사가 제대로 어울려 아주 매혹적이었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사소하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인 주제들이 마음에 든다. 다른 작가들이 추리소설에 양념을 더하기 위해 매력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근사한 공간과 광활한 시간을 넘나드는데 비하면 그는 작은 구멍가게 안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안에서 욕망하는 인간의 비뚤어진 범죄가 시작되고 그걸 파헤치는 사람 또한 신발을 꺾어신고 꽁초를 피우며 어슬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