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하는 걸 듣지 말고 그의 눈을 봐. 그 안에 담긴 비밀, 진실을 읽어봐"
오홋, 이렇게 멋진 영화가 있다니 하고 감동했던 것을 이제야 털어놓는다. 마치 아껴두었던 음식을 뒤늦게 꺼내 천천히 음미하듯이.. 남미의 배우들이 이렇게 매력적이구나. 이렇게 멋진 영화를 만드는구나. 새삼 놀라웠던 영화. 뛰어난 대본과 연출이 매력적이다. 2010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The Secret in their Eyes (2009, 아르헨티나/스페인, 129분) ; 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 리카르도 다린, 솔레다드 빌라밀 주연
기차역. 남자가 탄 기차가 역을 떠나는데 떠나는 남자를 향해 여자가 뛰어가며 무언가를 말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두 남녀는 안타깝게 손을 뻗지만 서로의 손은 닿지 않는다...
검사보로 오랫동안 일해온 벤야민은 은퇴후 소설을 쓰고 있다. 오래전 자신의 마음속에 절망감을 아로새긴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 초고를 끝낸 벤야민은 오래전 함께 일했던 검사 이렌느를 찾아간다. 그녀에게 가장 먼저 읽히고 싶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에게 하필 왜 그 사건에 집착하냐고 묻지만 그는 그냥 알 수 없는 것이 자신을 이끈다고 한다.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그런 그를 이렌느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소설을 읽어보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시간은 25년 전, 1970년대의 아르헨티나로 거슬러올라간다. 이렌느가 이제막 검사로 부임해 사무실에 들어서던 순간,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하게 된 벤야민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긴 생머리를 날리며 청순한 모습으로 들어서는 젊은 여검사. 유력한 집안의 딸이며 코넬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나이는 어리지만 그의 상사이고, 천사처럼 아름답지만 다가가기엔 너무 고귀한 사람이다.
그리고 한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화창한 오후, 결혼한지 얼마 안된 새신부가 알몸으로 강간당하고 심하게 폭행당해 죽은 모습으로 발견된다. 수많은 사건을 접한 벤야민이지만 사건 현장은 그에게 너무나 충격적이다. 무엇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피해자, 그리고 마치 악마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질투한냥 처첨한 사건 현장. 집안 곳곳의 액자에는 행복에 겨운 그녀와 남편의 모습들이 담겨 사건 현장은 현실이 아니라는듯 애처롭게 부정하고 있다. 절망에 빠진 피해자 남편 모랄레스에게 벤야민은 반드시 범인을 잡아주겠다고 약속한다. 사형은 어렵겠지만 종신형은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벤야민에게 모랄레스는 말한다. 범인에게 사형은 사치스러운 안식이 아닌가. 종신형이 더 나을 거라고.
사건 현장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던 벤야민은 모랄레스를 찾아가 피해자 주위를 맴돌던 남자가 없었는지 묻고, 그들의 오래된 앨범을 차근차근 살펴본다. 그리고 앨범에서 한 남자를 발견한다. 사랑에 빠진 남자만이 눈치챌 수 있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표정이 그에게 있다. 늘 피해자의 주위에 있고 무심한체 하지만 눈동자는 항상 그녀를 향하고 있는 한 남자, 고메즈. 그가 피해자 집 근처에 살고 있다가 최근에 행적이 묘연해진 것을 안 벤야민은 고메즈를 찾아 고향에도 내려가고 그가 암호로 가득 채워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분석, 천신만고 끝에 고메즈를 체포한다. 범죄를 인정하지 않지만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서 범죄를 읽은 벤야민은 이렌느의 도움을 요청하고 그녀는 벤야민을 믿고 고메즈를 충돌질해서 결국 범죄 사실을 털어놓게 한다. 종신형을 받게 된 고메즈. 그런데 웬걸, 1970년대 아르헨티나 독재정부는 반정부 게릴라 소탕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고메즈를 풀어준다. 심지어 군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고메즈는 벤야민과 이렌느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모랄레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벤야민은 절망하고, 사건을 진행하면서 벤야민의 열정에 매력을 느낀 이렌느는 점점더 벤야민에게 이끌리지만 집에서 정해준 사람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설상가상 고메즈가 벤야민의 집에 와있던 친구를 벤야민으로 오해하고 살해한 사건으로 벤야민은 고메즈를 피해 먼곳으로 피해가게 되면서 이렌느와 안타깝게 이별한다.
여기까지가 벤야민의 소설이고 과거의 이야기. 그의 소설을 읽은 이렌느가 두 사람이 헤어지던 그 기차역에서 내가 당신과 이루지 못한 사랑에 절망하는 걸 느꼈다면 왜 나를 데려가지 않았냐고 묻는다. 눈속에 담긴 비밀을 찾아 범인도 잡았으면서 왜 내 눈에 담긴 사랑은 읽어주지도 받아주지도 않았냐는듯이..
벤야민은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모랄레스를 찾는다. 그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원고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25년이 흐른 지금, 모랄레스를 찾아간 시골의 외진 저택에서 40년은 늙은 듯한 모랄레스와 만난다. 새출발하고 싶어서 이사했다고 하지만 집안에는 죽은 아내의 사진이 있고 집안은 두꺼운 벨벳 커튼으로 어둡게 침잠해있다. 서둘러 벤야민을 보내려는듯한 모랄레스. 벤야민이 이제라도 고메즈를 찾아 감옥에 넣고 싶다고 하자 모랄레스는 자신이 고메즈를 죽였노라고, 그를 납치해 총을 쐈다고 고백한다. 그러니 모든 걸 다 잊으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벤야민은 예전에 모랄레스가 했던 말이 자꾸 떠오른다. 사형은 범인에게 사치스러운 안식이 아닌가... 슬픔이 아닌 집념으로 가득한 모랄레스의 눈빛. 벤야민은 차를 돌린다.
저멀리 음식 쟁반을 들고 창고로 들어가는 모랄레스를 본다. 그를 쫓아 들어간 창고, 그곳에 모랄레스가 만든 감옥에 고메즈가 처참한 모습으로 갇혀있다. 25년만에 마주선 세 사람. 벤야민은 모랄레스의 집념으로 가득찬 복수의 현장에 서 있다. 아내가 죽는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형벌을 받고 있는 남자. 벤야민은 두 사람을 두고 돌아선다.
그리고 소설을 탈고한다.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얼굴의 벤야민, Temo(두렵다)라고 쓴 자신의 메모에 a를 넣어 Teamo(사랑한다)를 만들곤 다음날 설레는 마음으로 이렌느를 찾아간다. 더 이상 눈속에만 담아둘 비밀은 없다는 듯이. 이렌느가 아주 오래 기다렸어요 라는 듯한 눈빛으로 벤야민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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