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보고

Photographer 아라키 노부요시의 시선

guno 2013. 2. 8. 07:26

 

 

2002년 일민미술관에서 첫 아라키전이 열렸다. 전시회를 앞두고 주요일간지에는 연일 광고성 기사가 도배됐고, 한편에선 아라키전에 반대하는 피켓시위도 한창이었다. 함 볼까 생각하던 중에 사진을 업으로 하는 후배가 꼭 선배랑 봐야겠다며 끌고가 보게된 게 아라키와의 첫만남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아라키의 사진은 오픈하기 매우 어렵다. 거의 모든 사진이 여성의 누드이며, 그냥 누드보다는 밧줄에 꽁꽁 묶여 천장에 매달리거나 관속에 들어간 모습이 많다. 피를 철철 흘리기도 하고 자위를 하고 있거나 실제 정사장면을 담은 것들도 수두룩하다. 모델의 음모를 면도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그토록 많은 걸 보면 어지간히 많은 모델의 음모를 면도해준 듯했다. 홀딱 벗고 누운 여자의 요염한 포즈에 반해 그녀들의 처연한 눈빛은 또 얼마나 마음을 흔들던지. 꽃과 과일, 해산물 등을 찍었는데 그게 또 묘하게 에로틱한..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은 사진이 있는데,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내리막길 한켠에 있는 작은 문방구 앞에 앉았는데 무슨 일을 당했는지 옷이 다 풀어헤쳐져 있고 머리는 헝클어진채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그렇게 앉아있는데, 그 옆에 한 어린아이가 앉은뱅이 게임기 앞에서 등돌리고 앉아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흑백사진 속에서 조용히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여름 오후의 나른한 햇볕도 느껴졌다. 조용한 주택가, 모든 것이 흑백인 세상에서 그녀만이 빨간색 이미지로 채색이 되더니 점점 더 선명해지고 그리고 어느 순간 고개를 치켜든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치는 것이다. 소름이 끼치는 사진이었다. (영화 추격자를 보면서 서영희가 갇혀있던 집에서 빠져나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그것도 맨발로, 햇살 가득한, 매미 우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한 동네 골목으로 뛰어 달리는 장면에서 느꼈던 기시감은 아마도 아라키의 사진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라키 그가 여성의 육체를 통해 쾌락과 죽음을 동시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여성의 누드라 해서 외설이니 혹은 여성을 비하하는 사진이라며 핏대를 올리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제대로 보긴 했냐고 묻고 싶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19금 잡지였다는 <핫윈드>에 나오는 게 바로 외설이다. 누군가의 욕구 배설을 목표로 하는 살덩어리 사진. 한때 일했던 사무실이 <핫윈드> 편집부 아래층이었다. 간혹 애독자엽서가 섞이는 건 물론이고 위아래층 이웃이라 해서 신간이 나오면 서로 공유했으므로 덕분에 나는 한동안 <핫윈드>의 독자였다. 따라서 여성의 누드라면 질릴 정도로 봤고, 그런 내게도 아라키의 사진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꽁꽁 묶인 밧줄 사이로 힘겹게 비져나온 여자의 퉁퉁 불은 가슴이, 핏발 선 유두가 표정을 가지고 나를 응시했다. 야하면서 동시에 진지하고 매우 순수한. 게다가 그런 사진만 있었다면 모르겠는데 중간중간 그의 아내 요코의 사진도 전시되어 있었다. 결혼전부터 그의 모델이었고, 결혼 후에는 누드는 물론 그와의 정사장면, 심지어 산책길에 오줌 누는 모습까지 사진으로 찍힌 요코는 1990년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전시회에서는 옥상정원에서 물을 주는 요코, 고양이와 노는 요코, 잠든 요코, 아픈 요코, 죽은 요코, 관에 누워있는 요코 등 그녀를 추억하는 아라키의 사진들이 많았다. 짐짓 평범한 얼굴에 비범해 보이는 눈빛을 한 아내의 모습은 매우 성숙해서, 어린애같은 아라키와 묘하게 잘 어울렸고, 아라키의 사진에서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묻어났다.  

그의 사진 중에서 또 하나 좋았던 건 골목길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었다. 여자의 누드를 찍다가, 과일과 꽃들을 찍다가, 뜬금없이 골목길을 찍는다. 걷고 싶게 만드는 길을. 길이 예쁘다는 이유로 돌아가거나 기억해두었다 한번 더 찾아갈 정도로 골목길을 좋아하는 내게 그의 사진들은 보석처럼 빛나보였다. 멋진 길을 볼줄 알고 또 많이 아는 작가라 좋았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들도 기억에 남았다. 남자를 찍은 사진이 거의 없는 아라키지만 프로필 사진에서는 정말 다양한 남녀의 얼굴 표정들을 담아내고 있다. 당시 일민미술관 전시의 큐레이터가 누구였는지 모르지만 전시회의 마지막 코너는 아라키가 찍은 하늘로 도배되어 있었다. 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사진, 구름 한점 없이 청명한 사진 등 아라키는 정말 많은 하늘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들을 전부 이어붙여서 아라키의 하늘을 만들어놓았다. 칼라사진은 물론이고 흑백사진조차도 강렬한 색채감을 남기는 아라키의 자극적인 사진들을 보다가 마지막에 해맑은 하늘을 보고서는 어이없이 웃게되는. 아, 이 사람은 정말... 하고 반하게 만드는 전시회였다. 전시를 보고나와 미술관 1층 커피숍에서 큼지막한 잔에 담긴 커피를 홀짝거리며 "오~ 아라키 좋은걸"이라고 몇번이나 중얼거렸던 게 기억난다. 이후 그의 팬이 되어 일본영화제에 가서 아라키가 만들었다는 옛날영화도 보고 그의 사진집도 샀었다.

이제와 뜬금없이 아라키를 떠올린 건 얼마전 친구가 <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이란 책을 읽었느냐고 해서 안 읽었다고 했더니 그렇게 좋아하던 아라키 책도 안 읽고, 요즘은 대체 뭐에 빠져있냐고 물어왔기 때문이다. 글쎄, 난 요즘 뭐에 빠져있을까.. 덕분에 아라키의 사진집을 다시 꺼내보며 다시 즐거웠고,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그의 책과 새로운 사진집도 주문했다. 2013년, 나는 다시 아라키 아저씨에게 빠져볼 생각이다.

 

 

 

 

p.s. 아라키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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