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와는 내용도 다르고 만들어진 시기도 다르지만 한국에서는 2003년 같은 시기에 개봉됐다. 그래서 그때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 이자벨 위페르의 피아니스트, 이렇게 나누어 불렀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내게 매우 충격적으로 보였던 이 영화를 아무생각없이 다시 봤다. 괜히. 그리곤 후회한다. 이렇게 아픈 영화였던가. 잘 자고 일어나 맛있는 커피 한잔 마시고 구덩이에 발을 들여논 기분이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나는 열심히 들이대던 사람이 있었다. 내 젊음이 자신에게는 칼날이라고 했던 사람. 그래도 좋아한다며 발을 동동 구르고 만나달라고 보고싶다고 해도 늘 무시당하기 일쑤여서 마음고생을 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그에게 전화를 했었다. 피아니스트라는 영화를 봤는데 너무 좋아요. 같이 보러 가실래요? 봤다며. 그러게요. 근데 보기 전까진 당신하고 같이 보고싶은 영화인줄 몰랐으니까. 나랑 같이 영화보러 가요. 안 잡아먹을게요. 그랬는데 그의 대답은 그냥 "바쁘다" 였다. 내가 먼저 반해서 다가간 최초의 남자였고, 너무 무뚝뚝해서 괴롭혀주고 싶은 스타일이었다. 만난지 얼마 안돼 너무 좋아요 라고 대놓고 말한 뒤에는 모든게 쉬워져서 안아보지 않으면 칼인지 아닌지 모르는 거죠. 행복하게 해줄게요. 착하게 굴게요… 이래도 되나 싶을만큼 열렬히 고백하며 매달렸는데 전화를 끊고나서 이제 그만하자 하는 생각을 했던 게 기억난다. 다시는 전화하지 말아야지. 어쩌다 한번씩 따뜻해지는 이 사람을 바라보며 몇년을 보냈는데 이젠 더이상 기다릴수 없겠다. 난 내가 플라토닉한 사람이 아님을 안다. 당장 따뜻하게 안고 만질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늘 언제나 내가 먼저 다가갔으니 나만 여기서 멈추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고, 역시나 그랬다. 그래서 이 영화를 생각하면 자동으로 그가 떠오르는데 겁도 없이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거다. 그리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새삼 놀란다. 2003년의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상처받은 클레메에게 공감했었다. 에리카의 사정도 알겠으나 사랑으로 고통받고 잔혹해지는 클레메에게 훨씬 더 감정이입되었다. 그런데 오늘 본 영화에서 나는 에리카에게 깊이 공감한다. 그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날도 추운데 이렇게 아픈 영화는 보지 말았어야 했다. 깊은 구덩이에 빠진 기분이다.
피아니스트 La Pianiste (2001년) ;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원작, 미하엘 하네케 감독, 이자벨 위페르, 브누와 마지멜 주연.
에리카는 음학학교의 피아노 교수이다. 나이는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아직까지 변변한 사랑을 해본적도 없는 독신녀. 학교에서는 완벽을 추구하는 엄격한 선생님이지만 집에 돌아오면 나이든 엄마와 시시콜콜 싸우는게 일상인 쓸쓸한 여자. 하지만 엄마에게 에리카는 자신이 완성한 자부심이자 유일하게 의지하는 대상, 엄마는 자신이 딸의 아내이길 원한다. 그래서 딸에게 집착하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에리카의 수업시간과 개인교습, 연주회 리허설 시간을 일일이 체크하고 혹여 자신이 모르는 곳에 가서 모르는 사람을 만날까 전전긍긍하며 딸이 있는 모든 곳에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한다. 조금이라도 귀가 시간이 늦으면 조바심에 술을 마시고 급기야 화를 참지못해 옷장에서 딸의 옷들을 꺼내 발기발기 찢으며 소리를 지른다. 뒤늦게 돌아온 딸을 붙잡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덤벼든다. 에리카 또한 그런 엄마에게 진저리치며 같이 머리를 쥐어뜯고 뺨을 때린다. 하지만 결국 훌쩍이는 엄마을 끌어안고 사과하는 것은 늘 에리카다.
에리카는 자신만의 방을 가져본 적이 없다. 아빠는 그녀가 어렸을때 정신병원에서 죽었고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악에만 몰두한 시간, 자신의 방이 필요했던 적이 없다. 엄마와 나란히 침대에 누운 밤, 딸이 가르치는 모든 학생과 수업 내용을 알고있는 엄마는 잠자리에서도 이것저것을 물으며 에리카의 주변을 살핀다.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에리카. 설령 베토벤이 잘못 쓴 악보라도 잘못된 해석보다는 낫다며 무조건 악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엄격한 선생님답게 에리카는 자신의 고독하고 왜곡된 생활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변화란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그녀도 살아있는 인간이다. 수업시간, 학생들의 피아노 연주를 감독하는 그녀의 시선은 늘 창밖을 향하고 있다. 창가에 기대서서 팔짱을 낀 그녀는 귀로는 학생들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입으로는 음표 하나하나를 지적하고 비평하지만 창밖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엄마의 감시를 피해 자신만의 은밀한 일탈을 즐긴다. 성인전용 비디오방에 성큼성큼 들어간다.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피하지 않고 도발적으로 쏘아본 뒤 빈방에 들어가 포르노를 감상한다. 구석에 있는 휴지통을 뒤져 누군가 쓰고 버린 휴지를 집어들고 냄새를 맡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황색 포르노그래피에 빠져든다. 어느날은 자동차극장에 딸린 카페에서 오후 시간을 보낸다. 어둠이 내리고 영화가 시작되면 자동차 사이를 조심스럽게 옮겨다니며 흘끔거린다. 카섹스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 커플의 자동차. 그녀가 몰래 훔쳐보다 급기야 자동차 옆에서 옷을 내리고 오줌을 싼다. 그리고 젊은 커플에게 들켜 허겁지겁 도망친다. 자신의 아파트 로비까지 정신없이 뛰어온 에리카. 숨을 고르고 스카프를 고쳐 맨다. 계단을 올라 벨을 누른다. 우아한 에리카의 은밀한 귀가.
오늘은 그날이다. 욕실문을 잠그고 준비한 면도칼을 꺼내들고 욕조에 걸터앉는다. 날카로운 칼로 질에 상처를 낸다. 새빨간 핏줄기가 욕조에 긴 선을 그린다. 생리대를 대고 옷을 고쳐입은 뒤 면도칼을 다시 가방에 숨긴다.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그녀는 언제 폐경이 된걸까. 왜 그걸 엄마에게 숨기는 걸까. 에리카는 겹겹의 고치로 싸인 누에같다.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우아하고 엄격한 여교수라는 고치를 벗겨내면 히스테리로 가득한 엄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계집아이가 있고, 다시 한번 고치를 벗겨내면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따뜻하게 안아주길 기다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평범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비명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에리카가 가르치는 학생의 집에서 조촐하게 개최된 작은 연주회.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젊고 잘생긴 클레메가 다가온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생글생글 웃으며 연주가 좋았다고 말한다. 공대생의 어설픈 칭찬에 삐딱해진 에리카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았는지를 묻는 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클래식에 대한 열정과 풍부한 지식을 보여주는 클레메. 게다가 시니컬한 말투까지. 그에게 흥미를 느끼는 에리카. 슈만의 환상곡 C장조에 대한 아도르노의 글을 본적 있니? 슈만은 자신이 미칠걸 알고 있었어. 정신분열이 되어 완전히 버림받기 전에 이미 자신의 정신이 황혼에 도달했음을 알고 있었지.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매달려 곡을 완성한 거야. ..교수님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냥 슈베르트와 슈만을 좋아하는 것 뿐이야. (둘다 정신분열을 앓다 죽음) 게다가 난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미쳐 돌아가셨거든. 정신적 황혼이 어떤 건진 잘 알아.
조촐한 뷔페가 끝나고 집주인이 클레메를 손님들께 소개한다. 공대생이긴 하지만 피아노 연주가 뛰어난 자신의 조카라며. 교수님의 연주 뒤에 하려니 부끄럽다며 예정된 곡을 바꿔 슈베르트의 A장조 소나타의 스케르초를 연주하는 클레메. 현란하고 아름다운 연주가 시작된다. 정식 연주자 못지않은 경쾌한 연주, 클레메를 바라보는 에리카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갖지 못한 것을 꿈꾸며 선과 악으로 충만하게 되면 다음날 아침,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리라. …그러나 희망했다. 무언가 남아있기를. 베개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를.'
그날부터 클레메가 에리카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학업을 접고 음악학교에 입학 신청을 하는 클레메. 에리카와 교수진이 자리한 수험장. 수많은 음악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클레메는 단연 돋보이는 실력을 보여준다. 젊고 힘찬 기교로 가득한 슈베르트의 안단티노, 경쾌한 연주가 에리카를 향해 부딪쳐온다. 흔들리는 에리카. 다른 심사위원들이 공대 출신이지만 비범한 연주 실력을 보여준 클레메에게 너도나도 감탄하는 가운데 에리카가 매몰차게 말한다. 그가 이제와 음악을 하려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전적으로 음악에 매달리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무엇을 위해 음악을 하는지도 모르겠는 친구를 가르쳐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가 우리에게 기대하는건 뭘까요?
클레메는 에리카의 제자가 된다. 둘만의 첫 수업시간. 연주회에서 본 뒤로 당신이 내 마음에 박혔어요. 당신 때문에 학업도 관두고 여기 입학했잖아요. 당신 관심을 끌자고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데 나한테도 좀 기회를 줘요. 클레메는 용기있게 씩씩하게 애절하게 고백하는데 에리카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수업에 들어왔으면 앉아서 연주를 해. 그러지 말아요. 외출하기 좋은 날이잖아요. 연주하기 싫으면 그만 가든가. 도통 받아주지 않은 에리카에게 화가 난 클레메가 상기된 얼굴로 교실을 뛰쳐나간다. 에리카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간다. 몰래. 대학의 아이스하키 클럽으로 향한 클레메가 친구들과 함께 스틱을 휘두르며 얼음 위를 달린다. 클레메의 씩씩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리카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선다.
다음날, 연주회 리허설을 감독하는 에리카, 뜨거운 클레메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지만 모르는 척을 한다. 그녀의 여제자와 성악전공 학생의 앙상블 무대. 무대 설치를 돕던 클레메가 에리카의 여제자에게 농담을 건네며 웃고있다. 제자 옆에 앉아 악보를 넘겨주는 클레메를 초조하게 바라보던 에리카가 리허설 도중 연주회장을 몰래 빠져나간다. 그녀가 씩씩하게 들어선 탈의실에는 아무도 없다. 그녀가 유리컵을 손에 쥔다. 벽에 걸린 스카프를 꺼내 컵을 감싸고 발로 우지끈 밟는다. 산산히 부서진 컵을 스카프째 들어올려 여제자의 코트 주머니 속에 털어넣는다.
리허설이 끝나고 탈의실에서 제자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손에 온통 유리가 박힌채 울먹이는 제자. 사람들은 웅성웅성 모여드는데 창백해진 에리카는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간다. 그런 에리카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클레메가 눈치를 채고 따라간다. 여자화장실, 클레메가 쫓아와 화장실 문을 닫는다. 에리카를 끌어안고 키스를 한다. 그런데 뜨거운 키스의 도중 에리카가 클레메를 밀쳐낸다. 그리곤 조용히 그의 지퍼를 내리고 오럴을 한다. 클레메가 사랑해요, 이러지 말구요. 안고싶어요 라고 애원하는데 매몰차게 밀어부치는 에리카. 한마디라도 더 하면 여기서 나갈거야. 못 참겠어요. 제발요. 왜 나를 아프게 해요? 에리카가 몸을 뗀다. 냉정한 얼굴로 말한다. 내가 원하는 욕망의 리스트를 줄게. 그 안에서 네가 선택하면 돼. 어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알았어요. 근데 여기서 멈추면 안돼요. 싫어. 클레메가 할수 없다는듯 돌아서 자위를 하려는데 에리카가 멈추라고 한다. 멈추지 않으면 다신 안 봐. 돌아서 나를 봐. 그리고 그대로 있어. 지퍼를 올리지도 마. 그대로 멈춰서 나를 봐. 움직이지마. 미치겠다는 얼굴의 클레메가 말한다. 이러면 아프다구요! 불쌍하구나. 휴~ 선생님은 남자에게 이런 고통이 뭔지 아셔야 해요. 이건 평등하지 않잖아요. 만약 당신이.. 에리카가 화장실을 나가려 한다.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당신이 하라는대로 다 할게요. 리스트를 만들어서 줄거야. 이를 악문 클레메가 할수 없다는듯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알았어요. 다음번엔 더 잘할게요. 약속해요. 바지를 추스리고 씩씩하게 뛰어가는 클레메.
수업시간, 키스해도 돼요? 안고 싶어요. 끊임없이 매달리는 클레메에게 에리카가 편지봉투를 건넨다. 집에 가서 열어봐. 이런거 필요없어요. 왜 그냥 나를 안고 직접 말해주지 않는 거에요? 내말대로 하지 않으면 여기서 멈추겠어. 자포자기한 클레메가 그대로 앉아 연주를 시직한다. 수업이 시작됐다. 그날밤, 집에 돌아오는 에리카를 쫓아 클레메가 아파트까지 따라온다. 돌아가 편지를 읽고 내일 전화하라는 에리카를 무시하고 집까지 따라들어온 클레메. 너무 놀라 할말을 잃은 엄마도 무시한채 에리카가 클레메를 데리고 응접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테이블을 옮겨 못 들어오게 막는다. 내가 준 편지부터 읽어.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키스부터 하구요. 아니, 편지부터 읽어. 아이 참, 이럴거면 문은 왜 막은 거에요? 클레메가 소리내어 편지를 읽는다. "허리띠를 풀러 나를 때리고 손발을 묶어줘. 내가 그만두라고 하면 더 세게 때려. 내가 신고있는 스타킹을 벗겨 입을 틀어막고 내가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해. 그리고 내 얼굴 위에 앉아… 집안의 열쇠를 모두 줄테니 언제든 밤에 쳐들어와 나를 강간해. 엄마는 신경쓰지말고 방에 가두면 돼……" 클레메가 가만히 묻는다. 이거 진심인가요? 나 놀리는 거죠? 에리카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진짜 나한테 맞고 싶어요? 뭐라고 말좀 해봐요. 그 교양있는 입으로 이 빌어먹을 것들이 뭔지 설명해보라구요! 에리카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소파 밑에 숨겨져있던 가방을 꺼내 열어 보인다. 각종 고문용품이 들어있는 가방. 클레메가 어이없다는듯 바라본다. 에리카가 말한다. 나한테 화났어? 아니길 바래. 역겹다고 해도 할수없어. 맞고 싶은 충동이 생긴건 몇년 됐어. ..사실 난 널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편지에 쓴게 농담이 아니란 건 너도 알잖아. 긴장한 에리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젠 나랑 말도 하기 싫어? 그래도 생각해보고 내일 전화해. 클레메가 힘겹게 입을 뗀다. 당신은 아픈게 분명해요. 난 정말 당신을 사랑했는데.. 당신은 사랑이 뭔지도 몰라요. 당신은 정말 날 슬프게 하네요. 클레메가 자리에서 일어나 에리카의 집을 나간다.
얼마후, 아이스하키 연습을 마친 클레메 앞에 에리카가 나타난다. 할말이 있어. 아이스구장 옆 작은 창고로 들어가는 두사람. 그 편지는 미안했어. 너한테 갑자기 그래선 안됐는데. 난 바보야. 네 말처럼 우린 대화를 더 했어야 해. 이제부터 네가 하라는대로 할게. 날 용서해줘 응? 여기서 날 안아. 널 사랑해. ..이러지말아요. 누가 올지도 모른다구요. 상관없어. 난 괜찮아. 그녀가 클레메의 바지를 내린다. 반항하던 클레메가 나도 사랑해요 라며 그녀를 부둥켜 안는다. 그러나 바닥에 누운 그녀의 입에 대뜸 물건부터 집어넣는 클레메. 오럴을 하다 참지못하고 에리카가 구토를 한다. 우욱, 오물이 바닥에 흥건하게 번진다. 에리카는 미안해 라며 벌떡 일어나 창고안 수도꼭지에서 서둘러 입을 헹군다. 나 아무렇지 않아. 괜찮아. 깨끗해. 그런데 정작 클레메는 서둘러 바지를 입고는 화를 낸다. 도로 뱉어내는 여잔 처음이야! 미안, 다시 하자. 이러지마요. 입에서 냄새나요. 가서 입이나 더 헹구라구요! 앞으론 네가 하자는대로 다 할게 제발. 당신은 미쳤어요!! 클레메를 부둥켜안고 매달리던 에리카가 돌아선다. 창고문을 벌컥 열고 뛰어간다. 클레메가 바라보는 가운데 미끄러질듯 휘청거리며 허둥지둥 얼음 위를 달아난다.
그날밤 새벽, 모녀가 잠든 아파트의 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클레메. 에리카가 문을 열자 상기된 얼굴의 클레메가 소리친다. 한번 더 하자고 했었지? 지금 해! 이제와 무슨 소리야? 닥쳐! 더러운게!! 잠에서 깬 엄마가 놀라서 나오려는 걸 막고 침실문을 열쇠로 잠가버린다. 요란하게 숨을 몰아쉬며 클레메가 말한다. 당신이 말한게 이런 거지! 클레메가 에리카를 향해 손을 뻗는다. 이렇게 해달라고 했지! 그녀의 편지 내용을 하나하나 읊어가며 에리카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그녀가 멈추라고 소리치지만 멈추라고 하면 더 세게 때리라고 했었지! 라며 발길질한다. 어느새 에리카는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채 흐느낀다. 뭐야, 울어? 흥 그래, 이런게 나쁘다는 건 어린 나도 알지. 하지만 이렇게 된 데는 당신 책임도 반이라는 거 당신도 알지? 울먹이는 에리카. 그래, 알아.. 젠장! 나도 당신의 규칙을 알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구! 클레메가 피투성이의 에리카를 거칠게 덮친다. 무기력하게 누워 클레메를 견디는 에리카. 자신의 흥분에 못이겨 혼자 사정을 끝낸 클레메가 벌떡 일어난다. 바지를 추스리며 말한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게 좋을 거에요. 어차피 당신이 원해서 한 일이니까. 당신이 나한테 한 짓을 생긱해봐요. 남자를 모욕하면 안되는 거라구요. 그럼 난 갈게요. 그가 돌아가자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던 에리카가 힘겹게 문을 걸어잠그고 돌아서 무너진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드디어 연주회 날이다. 에리카는 손을 다친 여제자 대신 연주에 나서기로 되어있다. 엄마와 함께 외출준비를 하는 에리카. 그녀가 칼집에서 과도를 꺼내 가방에 몰래 숨긴다. 엄마와 함께 연주회장에 도착한 뒤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피해 구석에 몸을 숨긴다. 로비를 주시하는 에리카.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는 가운데 클레메와 그의 가족들이 들어온다. 그녀가 과도를 숨긴 손가방을 끌어안고 비장하게 다가간다. 아, 교수님~ 그의 가족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인사한다. 클레메도 반갑게 웃으며 인사한다. 교수님, 오늘 연주 기대할게요~ 지나가듯 인사하고 가족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간다. 뭐라 말할틈도 없이 그를 놓치고 뒷모습을 바라보는 에리카. 분한 마음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가만히 손가방에서 칼을 꺼내 손에 꽉 쥐고 자신의 가슴을 푹 찌른다. 칼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는다. 블라우스에서 피가 서서히 번져 나오는데 그녀가 돌아서 연주회장을 나온다.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길을 걷는다.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리게 복수하기, 한 남자의 블루 루인 (0) | 2014.08.01 |
---|---|
그녀의 홀로서기, 어레스트 미 (0) | 2014.07.29 |
ABC 오브 데스 1편. 종말 (0) | 2013.10.24 |
요시다 코우타, 조루란 시시하다 (0) | 2013.10.15 |
틸다 스윈튼 <아이엠 러브> + 빈센트 갈로 <테트로> (0) | 2013.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