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자 노트

박완서 선생을 추모하며

guno 2012. 8. 6. 01:46

 

2011년 1월 그녀가 여든 두 해의 삶을 마감한 뒤 MBC에서 <그해 겨울은 참 따뜻했네>라는 추모 방송을 했다. 나는 사실 그녀의 책을 좋아하는 독자는 아니었다. 아무리 매력적인 사람이라도 친구를 하고 싶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듯 몇권의 책을 통해 그녀를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아끼는 책의 목록에 그녀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추모 방송은 내 마음을 붙잡았다. 좋은 이웃을 두고도 잘 알지 못한채 보내버린 아쉬움이 있었고, 추모 방송을 통해 살아있던 당시의 그녀 모습을 보며 새삼 애틋함을 느꼈다. 한겨레21을 보다 그녀를 추모하며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가 쓴 글이 마음에 들었다. 제목은 "거대한 도서관 하나 무너진 듯한 이별"이다.

 

"휴전이 되고 집에서 결혼을 재촉했다. 나는 선을 보고 조건도 보고 마땅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청첩장을 찍었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 남자에게는 청첩장을 건네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나서 별안간 격렬하게 흐느껴 울었다." 박완서의 단편 <그 남자네 집> ('친절한 복희씨')의 한 대목이다. 그리고 선생은 정확히 네 문장을 더 적는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첫 사랑이었던 '그 남자'가 이 네 문장과 더불어, 언젠가는 졸업해야 하는 '학교'가 되면서 소설에서 퇴장하고 만다. 과연 대가의 문장이다. 이별을 고하는 자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자기합리화의 양상을 세 개의 단문과 잔인하리만큼 정확한 비유 하나로 장악한다. 비유란 이런 것이다. 같은 말을 아름답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사실'을 영원한 '진실'로 못질해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