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서

사색으로 가득한 책 한권, 그리스인 조르바

guno 2012. 8. 11. 14:44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출판사나 번역자의 이름을 보고 책을 고를 때도 있다. 열린책들은 문을 연 그해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애독하는 책들을 출판해왔다. 어느 날은 서점에 들어가 열린책들 코너를 기웃거리며 읽을 만한 게 없을까 하기도 한다. 여기에 이윤기 선생의 이름이야말로 책의 가치를 확신하게 해주는 것이라 그렇게 이 책을 만났다. 책상물림인 ‘나’와 카잔차키스가 여행 중 만난 실존인물이었다는 ‘조르바’가 동료로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되어가는 이야기.

 

- 나는 긴 문장으로 나 자신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시 대답했다. 나는 내 목소리를 조절할 자신이 없었다.

 

내 눈에 미완성 원고가 들어왔다. 나는 그 원고를 집어 읽으며 망설였다. 2년간 내 존재의 심연에서는 하나의 욕망, 한 알의 씨앗이 태동해왔다. 나는 내 내부를 파먹으며 익어가고 있는 그 씨앗을 내 오장육부로 느껴왔다. 씨앗은 자라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밖으로 나오려고 내 몸의 벽에 발길질을 시작했다. 내게 그것을 파괴할 용기는 더 이상 없었다. 정신적인 낙태는 시기를 놓친 것이었다.

 

내가 그와 함께 여행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오…”

 

그렇다. 나는 그제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조르바는 후끈 달아 있었다. 왼손으로는 수염을 꼬고 있었고 오른손은 술과 추억에 취한 여가수를 향했다. 말은 더듬었고 눈은 게슴츠레했다.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쪼글쪼글하게 늙고 화장이 천박한 늙은 여자가 아니라 그가 입버릇처럼 여자를 부를 때 쓰는 ‘암컷’이었다. 인격으로서의 여자는 사라지고, 젊든 늙든 아름답든 추하든 용모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모든 여자 뒤에는 위엄이 있고 신성하고 신비스러운 아프로디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조르바가 보고 말하고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얼굴이었다. 오르탕스 부인은 덧없는 순간의 투명한 가면에 지나지 않았고 조르바는 이 가면을 찢고 영원한 입술에 키스하는 것이었다. “나의 보물이여, 백설 같은 목을 들어요.”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애원했다.

 

확대경으로 보면 물속에 벌레가 우글우글하대요. 자, 갈증을 참을래요 아니면 확대경 확 부숴버리고 물을 마실래요?

 

그 눈은 나를 꿰뚫고 구석구석 뒤지는 것 같았다.

 

날씨는 무더웠고 구름은 아래로 내리 깔리고 있었으며 바람은 자기 시작했다.

 

내 마음에 크레타의 시골 풍경은 잘 다듬은 산문, 단정한 어순, 절도 있는 표현, 군더더기 수식을 피한 강력하고도 절제된 산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산문은 필요한 모든 것을 극히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법이다. 여기엔 경박한 데도, 작위적인 구석도 없다. 표현해야 할 것은 위엄 있게 표현하지만 엄격한 행간에서는 의외의 감성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시장하지 않으시다… 하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들지 않았어요?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 가엾게 여겨야지요. 두목, 육체에 먹을 걸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 아시겠어요?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저녁 노을이 마당에 황금 먼지를 뿌리는 것 같았다.

 

두목, 당신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고 싶다고 했지요? 가서 가르쳐주지 그래요.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데 굶어 죽으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건 미친 짓이다 이렇게 말이오. 당신의 그 엉터리 설교를 들어서 저 불쌍한 영감과 할멈에게 득될 게 뭐 있겠어요? 귀찮게 할 뿐이에요. 그 사람들 눈 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뜨여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비참해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 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만에 하나 그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지금의 암흑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줄 수 없다면…보여줄 수 있어요?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두목,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두목의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설명해 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일러 드리리다.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오소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아프리카 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몸을 땅이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내 인생은 한갓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걸레를 찾아 내가 배운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다른 길로 들어설 것인가! 내 오관과 육신을 제대로 훈련시켜 인생을 즐기고 이해하게 된다면! 그러자면 달음박질을 배우고 씨름을 배우고 수영을, 승마를, 배를 젓는 것, 차를 모는 것, 사격을 배워야 했다. 내 정신을 육신으로 채워야 했다. 내 육신을 정신으로 채워야 했다. 그렇게 하자면 내 내부에 도사린 두 개의 영원한 적대자를 화해시켜야 했다.

 

공자 가라사대 ‘많은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혹은 낮은 곳에서 복을 구한다. 그러나 복은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있다’던가. 지당한 말씀! 따라서 모든 사람에겐 그 키에 알맞은 행복이 있다는 뜻이겠네. 내 사랑하는 제자여, 스승이여. 이즈음의 내 행복도 그렇다네. 나는 내 키 높이를 열심히 재고 있다네. 자네도 알겠지만 사람의 키 높이란 늘 같은 게 아니라서 말일세.

 

나는, 이따금 내 길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렸다는 느낌, 내 신념은 불신의 모자이크라는 느낌 때문에 자주 혐오스럽다네.

 

산은 슬픔으로 일그러진 여자의 얼굴 같았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실신한 채로 비를 맞은 여자 같았다.

 

“말썽이 생기는 건 질색이에요!”라고 내가 짜증을 내자 “말썽이 질색이라고!” 조르바가 어이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산다는 게 곧 말썽이라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라오.”

 

당신은 귀머거리의 집 대문만 두드리는군!

 

그녀는 내 속으로 들어와 피로 흐르는 것 같았다.

 

한 해가 지나면서 내 심장에서 이파리 한 장이 떨어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암흑의 지옥으로 한발 다가서고 있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내가 인생과 맺은 계약에 시한 조건이 없다는 걸 확인하려고 나는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어봅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지요. 잘난 놈들은 모두 자기 브레이크를 씁니다. 그러나 두목,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날씨는 물속에 잠긴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했다. 올라갈수록 정신은 맑아지면서 고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한번 맑은 공기, 부드러운 호흡, 광막한 지평선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했다. 영혼 역시 동물처럼 허파와 콧구멍이 있어서 산소가 필요하고, 먼지나 안개 속에서는 호흡에 불편을 느끼겠다 싶었다.

 

나는 마지막 구절을 원고에다 휘갈기고 한 소리를 지르고 나서 붉은 연필로 내 이름을 큼지막하게 썼다. 그로써 끝이었다. 나는 뭉툭한 끈을 찾아 원고를 묶었다. 힘 센 적의 팔다리를 묶어버린 듯한 야릇한 쾌감이,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무덤에서 귀신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꽁꽁 묶어 묻어버리고 난 야만인 같은 야릇한 쾌감이 나를 휩쌌다.

 

늘 그렇듯이 잠이 나를 이겼다. 죽음 역시 나를 이기리라고 생각하며 나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목, 나는 겁나는 게 뭔고 하니 나이 먹는 거에요. 죽는다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끽 하고 죽고 촛불이 꺼지고, 뭐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나 늙는다는 건 창피한 노릇입니다. 나이먹어 가는 걸 인정한다는 것은 예사로 창피한 노릇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별 짓을 다 하는 거지요. 뛰고 춤출 때는 등이 아프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뛰고 춤춥니다. 술을 마시고 취하면 세상이 빙글빙글 돕니다만 나는 주저앉지 않아요. … 다른 사람들 앞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에요. 나 혼자 있을 때도 그럽니다. 나 자신에게도 늙는 게 창피한 겁니다.

 

조르바는 피가 덥고 뼈가 단단한 사나이였다…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이 뺨을 흐르고 기쁠 때면 형이상학의 채로 그것을 거르느라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