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든다면 이렇게 만들고 싶다. 야금야금 머릿속으로 들어와 생각거리를 잔뜩 만들어놓고 마지막엔 가슴을 북받치게 해서 기어이 감정을 폭발시키는 영화, 말도 없이 사람을 무너뜨리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의 감동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어떤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드는가. 한걸음에 달려가 악수라도 하고 싶다. 근데 이 감독, 각본도 혼자 썼을뿐 아니라 이게 장편 데뷔작이란다. 아 얼마나 멋진 재능인가. 게다가 주연을 맡은 배우는 정말 말도 안 된다. 어찌나 살 떨리게 연기를 잘 하던지 영화를 보는 내내 온전히 나는 이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너무나 멋진 연기를 해서 어떤 사람인지 검색을 했는데 몇년전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너무 안타깝다.
명작이 주는 감동은 이런 것이 아닐까.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나도 모르는새 바람 부는 언덕 위에 서서 히스클리프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이 영화는 평범한 서울 시민인 나로 하여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전, 공기마저 서늘한 동독의 거리를 걷게 했다. 옷깃을 세우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을 보며 왠지 눈길을 떼지 못하는 나. 결국 내가 돌아갈 곳은 어두컴컴한 감청실, 오늘도 그들의 삶을 도청하며 나는 감시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의 삶은 내가 오늘을 살 수 있는 힘이며 지켜내고 싶은 꿈인 것이다.
타인의 삶 The Lives of Others (2006년,독일) ;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 울리히 뮈헤 주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동독 정부는 비밀경찰(슈타지)을 이용해 국민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당시 슈타지의 규모는 10만명의 직원과 20만명의 정보원. 동독 국민 4명 중 1명은 슈타지였던 셈이다.
동독 국가안전부에서 일하는 비슬러 대위는 냉철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스파이 색출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어느날 그는 유명한 극작가 드라이만의 감시 임무를 맡게 되는데, 감시 도중 드라이만을 감시하는 이유가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최고 권력자 중 한명인 문화부장관이 드라이만의 아내인 여배우 크리스타를 좋아해서 드라이만을 제거할 구실을 찾고 있는 것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나름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그에게 이런 사실은 의욕을 떨어뜨리는 계기가 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그에게 탐욕스런 관료의 개 노릇을 시키는 시스템에 염증을 느낄 즈음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랑 가득한 일상이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재능있고 열정적인 두 남녀의 지적인 대화와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 그리고 뜨거운 섹스. 그들의 삶은 비슬러가 한번도 꿈꾼적 없던 그런 것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을 사랑하게 된 비슬러. 권력을 이용해 크리스타를 강간하는 문화부장관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쩔수 없이 문화부장관의 부름에 따를 수밖에 없는 크리스타를 보면서 자기 일처럼 분노한다. 크리스타의 외도를 알지만 그녀를 지켜줄 수 없어 홀로 눈물을 흘리는 드라이만의 슬픔에 공감한다.
그러던 어느날 드라이만이 결국 사고를 친다. 동독의 실정을 알리는 기사를 서독 잡지에 가명으로 연재하기 시작한 것. 동독 정부는 작가를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고, 비슬러 대위에게도 엄중경계령이 떨어진다. 이때부터 비슬러는 드라이만을 보호하기 위해 감시 보고서를 조작하고 수색이 시작되기 전 미리 드라이만의 집에 들어가 증거를 숨기는 등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최고의 첩보 실력을 자랑하는 그인 만큼 자신의 온힘을 다해 두 사람을 보호하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사고가 터진다. 불법으로 약을 구입하던 크리스타가 경찰에 붙잡혀 협박을 받던 중 드라이만이 비밀작가임을 털어놓은 것이다. 결정적 증거인 타자기를 찾기 위해 드라이만의 집을 수색하는 슈타지, 하지만 비슬러가 선수를 쳐서 타자기를 찾지 못하고 그 순간 크리스타는 자신에 대한 혐오와 절망감을 안은채 아파트 밖으로 뛰쳐나가 트럭이 달리는 도로에 뛰어든다. 뒤늦게 알고 뛰어와 크리스타를 품에 안고 오열하는 드라이만과 저만치 떨어져 그들을 바라보는 비슬러.
시간이 흘러 어두운 지하실. 드라이만 체포 작전을 방해한 혐의로 강등된 비슬러가 편지를 검열하고 있다. 죽은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일하는 비슬러의 사무실에 전화가 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다시 2년의 세월이 흘러 독일은 통일되고 드라이만은 다시 극작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우연한 자리에서 예전의 문화부장관을 만난 드라이만이 묻는다. "그 당시 왜 나는 감시하지 않았소?" 문화부장관이 말한다. 무슨 소리, 당신의 모든 것을 감시했다. 증거를 포착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집으로 돌아온 드라이만은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도청장치를 찾아낸다. 그리고 감시를 당했음에도 비밀작가가 자신이라는 게 들통나지 않은 이유를 찾기 위해 동독 시절의 감시자료를 찾아본다. 그의 생활이 고스란히 적혀있는 감시자료. 근데 이상하다. 서독 잡지에 글을 연재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반정부 동료들과의 대화도 어째선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협박에 시달려 자살한 것으로만 알았던 크리스타가 자신을 비밀작가라 폭로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가 슈타지에게 타자기의 위치를 알려줬다는 것도. 그렇다면 슈타지는 왜 타자기를 찾지 못했을까. 그녀가 말한 그곳에 뒀었는데. 그리고 보고서에서 이름 하나를 발견한다. 감시책임자 HGW XX/7. 그제서야 드라이만은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준 이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숨막히도록 감시받고 핍박받았다고 생각했던 동독 시절, 그를 지켜준 한 사람이 있었다.
다시 2년이란 시간이 흘러 드라이만의 신작 소설이 발표된다. 서점에는 드라이만의 얼굴과 '선한 사람을 위한 소타나'라는 책 제목이 커다랗게 인쇄된 포스터가 걸려있다. 우편배달부로 일하는 비슬러가 서점 앞을 지나다 포스터를 보고 서점에 들어선다. 책을 펼치던 그에게 첫 페이지의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감사한 마음으로, 이 책을 HGW XX/7에게 바칩니다' 계산대 앞에 선 비슬러. 점원이 포장해줄까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한다. "아니요. 이 책은 나를 위한 겁니다." 그가 지켜낸 타인의 삶이 그제서야 그의 삶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 먼길을 돌아온 메아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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