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박찬욱 최고의 복수

guno 2012. 8. 15. 18:25

 

 

올드보이를 보고 난 뒤 먹먹한 가슴 때문에 쉬이 집에 갈 수가 없었다. 후배녀석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이러쿵 저러쿵 영화 얘기를 나누고도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두고두고 영화의 분위기에 취해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 내 마음속 박찬욱의 영화는 올드보이가 1순위였고, 그 다음이 이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이었다. 두 영화는 내가 본 최고의 한국영화라 생각되었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박찬욱 감독은 가장 페이보릿한 영화인이었다. 그런 그가 내 마음속에서 존재감을 잃기 시작한건 친절한 금자씨부터. 심지어 박쥐는 영화를 본 뒤 입맛이 써서 영화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가 좋았던 건 박찬욱 그가 제법 재밌는 얘기를 할줄 아는 감독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여주던지... 그가 보여주는 인물들에 흠뻑 빠졌었다. 알고보면 복수처럼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것도 없다. 세상의 흔한 사람들은 결코 복수를 계획하지도 그것을 실행하지도 못한다. 포기하고 비굴하게 사는 게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지혜롭게 사는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영화속 인물들은 얼마나 멋진가. 자신의 복수는 바로 나의 것이라며 그것을 해내는 인물들 하나하나가 어쩜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던지, 그들의 열정이 부러웠다. 너의 복수도 나의 복수도 내 것은 아니라고 외면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복수를 하고 복수를 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슬픈 인간들이어서 애틋한 마음이 들지만 세상 사람 모두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러니 그것이 특별한 슬픔은 아닐 터이다.

그래서 박찬욱의 복수 시리즈 마지막,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컸고, 소개팅 때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극장에 갔었다. 근데 영화가 정말 별로였다. 뭔 말이 그렇게 많은지... 간결하고 강렬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던 이전 영화와 달리 친절한 금자씨는 너무 수다스러웠다. 관객들에게 이래서 이렇게 된 거다 하고 설명하는 요소가 너무 많아 그의 수다를 듣다 지칠 지경이었다. 이전부터 박찬욱 스타일의 비주얼을 좋아했었는데 친절한 금자씨는 그 비주얼이 너무 과해서 인물들의 감정을 도드라지게 하는게 아니라 인물들의 존재감을 묻어버리는 걸 보고 이게 뭔가 하고 실망했었다. 그리고 박쥐는 친절한 금자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말수가 적긴 하지만 몇 마디 말로도 충분한 사람, 마주 앉아 새벽까지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쉴새 없이 수다를 떠는게 아니라 조근조근 이야기를 이어가고, 말이 끊기는 순간에도 전혀 심심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던 박찬욱 감독이 어느새 쉴새 없이 뭔가를 뱉어내는데 그 말들이 너무 공허하기만 해서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올드보이와 복수는 나의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올드보이보다 복수는 나의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올드보이가 잘 만든 무대 위의 연극 같다면 복수는 나의 것은 바로 옆집에서 일어난 사건사고처럼 생생해서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임에도 몇몇 장면은 생각하는 순간 머리속에서 착, 하고 테이프가 돌아가며 재생이 된다.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을 탑 앵글에 담아 구구절절하게 인물의 표정을 담아내는 대신 관객으로 하여금 상황을 주시하게 했던 그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이 문득 보고싶어지는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