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왜 이런 영화를 골랐는지 나 자신도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 영화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만 보였던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현기증 Entangled (2014년) ; 이돈구 각본·감독, 김영애 주연
남편을 여의고 홀몸으로 과수원을 운영하며 두 딸을 씩씩하게 키워온 엄마는 고아지만 반듯하게 자라 의사가 된 데릴사위가 마음에 든다. 여고에 재직 중인 큰딸도, 큰딸이 교사로 있는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 작은딸도 어디 내놔도 자랑스럽기만 한 존재들이다. 며칠 전 출산한 큰딸은 집에서 육아휴직 중, 엄마는 큰딸과 아기를 돌보느라 정신없이 바쁘지만 그래도 마냥 행복하다. 평소에도 잘했지만 아기가 태어난 뒤 더욱더 살갑게 대하는 사위도 보기 좋고, 힘들게 키운 큰딸이 아기를 낳고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종종 가스 불을 켜놓고 깜빡하거나 날짜를 기억하지 못해서 딸들에게 치매 아니냐고 놀림을 받지만 웃어넘길 만큼 여유도 있다. 그녀의 노년, 지금까지 제법 잘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큰딸이 낮잠을 자는 무더운 여름 오후, 엄마는 손주의 목욕 준비를 한다. 욕실 바닥에 대야를 놓고 따뜻한 물을 채운 뒤 옷을 벗긴 아기를 가슴에 포옥 안는다. 머리부터 디밀고 천천히 머리를 감기기 시작한다. 조심조심, 아직 탯줄도 떨어지지 않은 아기의 목욕은 베테랑 엄마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던 중 픽 하는 소리와 함께 정전이 된다. 한낮이라도 불이 꺼지면 어두워지는 욕실, 깜짝 놀란 그녀에게 현기증이 일어난다. 아이고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쓰러진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고요한 욕실, 창밖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욕실 불은 다시 켜져 있다.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그녀의 눈에 손주의 모습이 들어온다. 창백한 얼굴로 물속에 잠긴 아기. 서둘러 안아보지만 어디에도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가 아기를 안은 채 털썩 주저앉는다. 세상이 너무 고요하다. 끝난 것만 같다. 모든 게.
어떻게 할까. 어째야 할까. 절망에 빠진 그녀가 어느 순간 무서운 것을 내팽개치듯 아기를 다시 대야에 넣는다. 욕실 문을 조심스럽게 연다. 큰딸이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다. 소리내지 않고 방으로 간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는다. 눈을 꼬옥 감는다. 낮잠에서 깬 큰딸이 엄마를 찾는다. 방문을 열고 잠든 엄마를 바라본다. 엄마 자? 뭐야.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방바닥에 떨어진 욕실 슬리퍼를 발견한다. 왜 이게 여깄어? 참나. 어이없이 웃으며 돌아선다. 아기 목욕시키고 있을게. 그리고 잠시 후 큰딸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진다. 엄마가 욕실로 달려간다. 큰딸은 얼른 아기를 꺼내 안고 이름을 부르며 오열한다. 엄마가 다가가지만 딸은 엄마를 밀치고 아이를 안은 채 달린다. 맨발로 집을 뛰쳐나가 달린다. 지나가던 택시를 잡는다. 엄마가 따라 나와 딸을 붙잡으려 하지만 어림없다. 큰딸은 돌아보지도 않고 거칠게 택시 문을 닫고 병원으로 향한다. 정신없이 딸을 쫓아가던 엄마가 걸음을 멈춘다. 여전히 해가 쨍쨍한 한여름 오후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전과 지금은 세계가 달라진 것 같다.
아기는 그렇게 짧은 생을 살고 떠난다. 이런 날벼락이 없다. 온가족이 절망했다. 가족들은 아기를 그렇게 해놓고 방에서 잠든 엄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잖아. 그럼 이 상황은 뭐지? 왜 저렇게 울기만 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하는 걸까. 왜 아무 말도 않고 울기만 하는 걸까. 엄마가 왜 저러지? 우리 엄마가 미쳤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가족들은 궁금하지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이 더욱더 화가 난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식들 일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최선을 다해온 평범 그 자체 대한민국 표준 순임여사, 우리 엄마가 아닌가. 큰딸은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향한다. 혹시 이것도 치매인가요? 엄마는 치매 검사를 받는다. 차라리 치매라고 해주길 바라는, 혹은 그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정신줄 놓은 거죠? 아무래도 우리 엄마가 아닌 것 같아요. 치매 맞죠? 큰딸은 확인받듯 의사에게 묻지만 치매는 아니라는 검사 결과. 이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야.. 엄마의 행동을 이해하고 싶었던 큰딸은 한번 더 절망하고, 엄마는 그런 딸을 바라보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침묵한다. 침묵이라는 방어벽만이 그녀를 살릴 것처럼 웅크리고 앉아 매순간 벽을 세우고 또 세운다. 말하는 순간 모든 걸 잃는다는 생각으로, 이 순간은 어떻게든 지나갈 것이란 기대 혹은 희망을 품은채.
하지만 침묵은 상처받은 가족들을 치유하지 못한다. 매일 술에 취해 들어오는 사위와 방문을 잠그고 틀어박힌 큰딸. 언니의 마음도 알겠고 언니와 형부의 눈치를 보느라 고개도 들지 못하는 엄마가 짠해서 마음 아픈 작은딸은 매일 한숨을 뒤며 등교한다. 열심히 집안을 청소하고 요리를 하며 가족들이 다시 한 식탁에 앉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과 달리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절망중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방문을 열고 나온 큰딸이 말한다. 나가 살게. 지금은 엄마랑 같이 못 있겠다. 사위와 큰딸은 별다른 인사도 없이 짐을 챙겨 나간다.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작은딸은 화가 잔뜩 난 얼굴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엄마는 다시 혼자가 된다. 어떻게 하지? 어째야 할까? 엄마는 이리저리 생각하지만 가족들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내가 죽어야지.. 하지만 죽기는 쉽지 않다. 죽지 못해 산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가을이 되지만 여전히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딸과 사위는 힘겹게 일상을 되찾지만 순간순간 절망하고, 엄마는 일상을 살지만 영혼이 없는 무생물처럼 하루하루를 반복할 뿐이다. 그러다 문득문득 정신을 놓는다. 살갑게 굴다가 느닷없이 버럭 화를 낸다. 얘기를 하다가도 다시 5분 전으로 되돌아가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엄마. 그런 엄마를 바라보며 작은딸의 방황이 시작된다. 평소엔 눈길도 주지 않았을 날라리들과 요즘 부쩍 눈이 자주 마주친다. 그런 작은딸을 날라리들도 예의주시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하교길에 날라리 대장이 작은딸을 불러세운다. 그리고 작은딸의 지옥이 시작된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올가미, 따로 만나자는 약속을 무시했다가 친한 친구가 대신 폭행을 당한다. 이후 친구가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한다. 다른 아이들도 곁에 오지 않는다. 한번 더 약속을 어기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나간 자리에서 원조 교제를 강요당하고 모텔로 끌려간다. 남자와 한번만 자고 나오면 돼. 넌 그냥 누워있기만 하면 돼. 그리고 돈 받으면 토낄 생각 말고 그대로 가져와. 그러면 때리지도 않고 잘해줄게. 도망치려 해도 울며 매달려도 들어주질 않는다. 날라리의 문자 안내를 받고 모텔을 찾아온 남자는 엉엉엉 우는 작은딸을 강간한다. 성공적인 사업 개시에 기뻐하는 날라리, 순진하게 생긴 작은딸로 벌어들일 수익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난다. 그리고 작은딸은 자신에게 펼쳐질 앞날이 어떨지 너무나도 분명하게 직시한다. 도망칠 수 없을 거야. 난 이제 끝이야.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잠근다. 다음날, 개교기념일이라며 학교도 가지 않고 방안에 틀어박힌다. 그런데 날라리가 찾아와 창문에 돌을 던진다. 무섭다. 귀를 막아도 눈을 감아도 공포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다. 난 혼자고 결국 저 어둠에게 먹힐 게 뻔하다. 엄마가 빨랫감을 들고 마당으로 나온다. 빨래를 널려는데 빨랫줄이 없다. 애, 빨랫줄 어쨌니? 엄마가 작은딸의 방으로 들어선다. 침대 받침대에 꽁꽁 묶인 빨랫줄이 창문 밖으로 연결돼 있다. 창밖을 내다본다. 작은딸이 목을 매고 버둥거리고 있다. 얼른 줄을 잡아당겨 보지만 어림없다. 손이 까지도록 잡아당겨도 줄은 올라오지 않는다. 엄마는 뒤돌아 달려 나간다. 도와주세요!! 그리고 우당탕, 현기증을 일으킨 엄마가 계단을 구른다.
다시 또 하루가 시작된다. 꽤 오랜 시간 작은딸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엄마는 작은딸을 볼 때마다 학생이 학교에 가야지, 너 도대체 왜 이러니? 하고 잔소리를 한다. 그러면 작은딸은 상관 마, 하고 돌아선다. 근데 엄마, 언니 너무 한 거 아니야? 엄마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러게 나쁜 년!! 엄마도 눈을 부라리며 화를 낸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며 작은딸이 말한다. 근데 엄마 왜 이렇게 됐을까? 왜 그랬어? 이럴 거면 우리 다 같이 죽을까? 그럴까. 이유를 댈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두 사람은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고 말한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산소를 잃어 질식을 일으키기 직전 큰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부모자식 간에 인연을 끊을 수도 없고, 엄마가 안 좋은 상태라면 그걸 돌보는 것도 자식의 몫이다. 요즘 동생이 학교에서 안 좋은 아이들과 어울린다는 동료교사의 말도 마음에 걸린다. 다시 들어가 살게요.
큰딸과 사위가 돌아오는 날, 엄마는 정성껏 음식을 준비한다. 너도 그만 정신을 차려야지, 형부랑 언니한테까지 걱정 끼치면 안 되잖니 작은딸을 향한 잔소리도 멈추지 않는다. 작은딸은 그런 엄마를 시큰둥하게 바라본다. 엄마가 끓이는 육개장 맛을 보더니 너무 짜다며 어디선가 물통을 들고 와 들이붓는다. 사위와 딸이 돌아왔다. 정말 오랜만에 한 식탁에 마주 앉았다. 작은딸은 아프다며 방에서 나오지 않고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한다. 엄마, 문제가 있다면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봐요. 그래 그러자. 그 순간 국을 한 모금 먹은 큰딸과 사위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쓰러진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시뻘게진 얼굴로 신음한다. 엄마를 바라보며 두 팔을 내젓지만 내장이 녹는 극심한 고통으로 말을 할 수조차 없다.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하던 엄마가 정신을 차리고 얼른 식탁에 앉는다. 자신의 국그릇에 담긴 것을 한 숟갈 뜬다. 한모금만 먹으면 되는데. 그런데 손이 떨려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엄마의 두 눈에 핏발이 서고 숟가락을 든 손은 사정없이 떨리는데 아무리 먹으려고 해도 먹을 수가 없다. 죽어가는 두 사람들을 바라보며 엄마가 다시 집밖으로 뛰쳐나간다.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요!!! 정신없이 달리던 엄마가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시간이 흘렀다. 집 앞 마당에 경찰차가 잔뜩 서 있다. 구급차가 거품을 물고 경련중인 큰딸과 사위를 실어 나르고 경찰은 싱크대 위에서 제초제 빈병을 발견한다. 작은딸이 들이부은 물통이다. 2층을 살펴보던 경찰이 이리 와보라며 큰소리친다. 경찰들이 우르르 올라가 2층 창문에서 목을 매달고 죽어있는 작은딸을 발견한다. 죽은지 오래된듯 작은딸은 이미 부패가 많이 진행된 상태. 도대체 이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엄마는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문득문득 누군가 쳐다보는 것 같아 하루에도 몇 번씩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몇 번이나 죽으려 하지만 죽을 수가 없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다시 또 욕실, 정전이 되었던 욕실에서 깨어나는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욕실 문을 조용히 연다. 큰딸이 소파에서 잠들어있다. 딸을 조용히 바라보던 엄마가 몰래 욕실을 빠져나온다.
첫번째 현기증, 두번째 현기증, 세번째 현기증. 반복되는 현기증, 그리고 심화되는 불안과 히스테리의 증거들. 여기까지는 가벼운 마음으로 봤다. 아니 봐졌다. 하지만 마지막 가족동반자살, 혹은 근친살인을 계획하는 부분에서는 사실 놀랬다. 자살로는 끝나지 않는다. 모두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기존의 가족동반자살은 자신이 죽으면 자녀의 생존 또한 위협받는다는 운명공동체적 관점에서 이뤄지는데 반해 여기서 큰딸과 사위는 다 큰 성인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생활이 위협받지 않는다. 따라서 엄마의 근친살인은 가족보호의 측면보다는 징벌적 성격이 강하다. 헌신으로 키운 자식들은 자아의 연장선상에 있고, 그러니 나를 죽이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자식과 함께 죽는 것, 자신을 처벌하기 위해 자식을 죽인다. 혹은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의 실수를 잊어버리기 위해 목격자들을 죽이는. 살기위한 몸부림으로 자행된 근친살인일수도.
인간은 슬프게도 타인의 믿음과 인정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신뢰를 통해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감을 얻는다. 그것이 어느순간 터무니없는 실수로 인해 무너졌을 때, 자기가 생각해도 회복되기는 힘들다고 판단될 때, 끝났다고, 막다른 곳에 몰렸다고 생각이 들면 자존감은 무너진다. 구석에 몰린 인간은 얼마나 참담할 수 있는가. 그 상황에서 인간이 하는 돌발행동은 평소의 이성과는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분출된다. 엄마이기에 더욱더 자신의 실수의 무게를 느낀 순간,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욕실 문을 열고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종말을 느낀 엄마가 보여준 실로 어린애같은 본능. 그리고 누구도 다 큰(?) 어른인 그녀에게 그녀의 실수가 일으킨 데미지가 얼마나 컸을지 헤아려주지 않았다. 다만 이성적으로 올바르지 않음을 질타했다. 치유될 수 있는 시간을 믿었건만 둘째딸은 목을 맸고, 목을 맨 빨랫줄은 너무나 강해서 자존감 잃은 인간의 힘없는 손을 밀어냈다. 마치 넌 필요없다는 듯. 그래서 죽은 둘째딸은 엄마의 마음속에서 깊이 꿈틀거리던 말을 대신 내뱉어준다. 마치 위로하듯이. 그럼 다 같이 죽을까? 모두 끝내버릴까.
인간은 모두 스스로를 막다른 곳에 몰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상을 살아내지만 어쩔 수 없는 현기증처럼, 그런 상황은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고, 그렇게 내몰린 내가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현기증같은 잔인한 사태를 굳이 모성이라는 사회적 절대선(絕對善)에 대입해놓은 영화의 냉소적 시선에 박수를. 자식들의 죽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스스로의 죽음은 도저히 선택할 수 없었던 엄마가 마지막 장면에서 거울을 보며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마치 어린애같은 것도 자존감을 상실하고 생존본능만 남은 인간의 슬픈 자화상이라 더욱 실감났다는. 그래서 결국 소름끼치도록 현실적인 이 영화를 올해의 첫 영화로 선택하고는 왜 그랬을까 계속 곱씹고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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