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고. 그러나 그 자신과 신을 믿지 않는 인간이 평등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대교도를 강제수용소에 가두는 것은 인도적으로 '옳지 않을'지라도 기독교적으로는 완전히 '옳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출입문 위에 걸려 있었듯이 "기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은 정신을 노동으로 단련함으로써 자유롭게 한다"는 논리도 성립되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다가. 나 또한 편견과 오만으로 가득찬 기독교에 대해 극히 개인적인 감성으로 비호감을 품고 있어서, 로마에 살면서 기독교도가 아닌 시오노 나나미의 이런 구절과 만나니 반갑고 좋았다는.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로마인에 대한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에 의해 왜곡된 역사가 얼마나 뿌리깊게 우리에게 파고들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자신들만이 역사의 희생양이라고, 부패한 권력자와 무지몽매한 이교도들에게 핍박받았다고 우는 소리를 하지만 실은 인류 역사에 종교가 나타난 이래 가장 오랜 시간 패권을 쥐었고, 종교라는 이름하에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인류를 억압한 것이 기독교임은 어디에서도 반성하지 않는 그들에 대해 알 수 있게 한다. 기독교도를 살육하는 잔인한 로마인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우리에게 잘못된 편견을 심고 왜곡된 역사관을 만들어주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유일신을 숭배하지 않았기에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이었던 로마인에 대해 이만큼 알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읽는 수고가 있으나 읽음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만족은 훨씬 더 큰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가 왜 그렇게 로마인에게 천착하는지 알 수 있다. 최근에 '아고라'를 봤는데, 시오노 나나미와 같은 시각에서 역사속의 기독교를 바라본 작품이라 인상깊었다.
아고라 Agora (2009년)_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 레이첼 웨이즈 주연 : 4세기 이집트의 중심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격변기를 맞고 있다. 신화에 기반한 다신교에 맞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힘을 키운 유대교와 이제막 신흥종교로 부각한 기독교 사이에 반목과 싸움이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히파티아는 존경받는 철학자이자 천문학자. 그녀는 아버지가 관장으로 있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유력가문의 자제들에게 철학을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자신의 노예 다부스에게도 넘치는 사랑과 보호를 받지만 그녀의 관심은 오직 균형있는 사고와 객관적 판단, 그리고 오묘한 우주의 법칙에 대한 새로운 발견 뿐이다. 모든 종교가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다신교를 오랫동안 믿어왔던 이집트 사회에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는 이교이며, 악의 근원이라고 설파하는 기독교가 서민들 사이에서 힘을 키우기 시작한다. 신들의 동상을 부수고 신화에 기반한 다양한 학문과 예술을 종교라는 믿음으로 없애야 한다고 대중을 선동한다. 폭력과 광기로 힘을 키우는 기독교에 대해 우려하며 그들과 맞서 폭력으로 응대하는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끝까지 객관적인 입장을 고수하려고 하지만 결국 권력을 잡은 기독교에 의해 마녀 판정을 받고 죽음의 위기에 몰린다. 예수님의 믿음 아래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성경 말씀에 감복해 그녀를 떠나 기독교 수호자가 되었던 노예 다부스는 도서관을 부수고 책을 불사르고 유대교를 핍박하고 이교도를 죽여가며 히파티아와 자신 사이에 벽이 되었던 사회와 역사를 모두 부숴버리겠다고 마음먹지만, 어느 순간 그녀와 자신을 갈라놓은 것은 이집트의 신분제도가 아니라 종교적 광기와 오만이었음을 비로소 알게된다. 주인과 노예였으나 친구였던 두 사람이 만날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건, 그가 그녀를 믿지 않고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이다. 히파티아가 기독교 수호자들에게 이끌려 옷을 벗기고 폭력적인 죽임을 맞이하려는 순간, 다부스는 잠시 그들의 눈길을 딴곳으로 돌린 뒤 히파티아를 꼭 껴앉는다.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입을 막고 목을 조른다. 다부스의 품안에서 숨을 거둔 그녀를 두고 다부스는 발길을 돌려 먼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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