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예전엔 정말 멋졌던 미이케 다카시

guno 2013. 1. 19. 08:08

 

 

호러영화라면 사죽을 못쓰는 나는 동네 비디오가게에 있는 모든 호러영화를 섭렵하리란 목표를 세우고 매주 토요일마다 퇴근길에 비디오가게에 들렀던 시절이 있었다. 워낙 많은 영화를 보다보니 보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많은데, 보고 즐기는 게 목적이지 비평이나 기록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보고 또 봐도 좋았다. 특히 나이트메어를 좋아라 해서 볼만한 영화가 없을 땐 으레 나이트메어 한 번 더, 하곤 했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마스터즈오브호러(Masters Of Horror)였다. 영화에서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무섭다고 생각하기보다 저 장면을 만들기위해 감독과 스태프들이 머리를 맞대고 얼마나 고민하고 연구했을까 싶어 몸을 앞으로 쭈욱 내미는 내게 내노라하는 호러 감독들이 모여 옴니버스로 만든 마스터즈오브호러 시즌1은 축제같은 작품이었다.

인상깊은 오프닝으로 시작해 재기발랄한 감독들의 다양한 작품들이 눈길을 사로잡은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게 바로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임프린트>였다. 보는 순간 다른 작품들은 머릿속에서 다 지워버릴만큼 강렬한 영화였다.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끔찍한 영화라니 정말 대단하다, 너무 좋아! 라며 미이케 다카시라는 이름에 관심이 생겼을 즈음 한 후배녀석이 미이케 다카시의 작품이 상영되는 일본영화제를 소개했고, 거기서 본 것이 <이치 더 킬러>였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않고 기습적이고 항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선혈이 낭자한 장면들에 압도당했을 뿐 아니라 극을 이루는 개성적인 캐릭터들의 향연이 멋들어졌다. 완전 미이케 다카시 만세 였다. 한동안 그의 작품을 찾아보는 재미에 빠졌었는데 <임프린트>나 <이치 더 킬러> 만큼 재밌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스타일리시한 학원폭력물 <크로우즈제로>나 나름 괜찮았던 <착신아리>와 <박스>는 멋진 영화지만 미이케 다카시에게 기대하는 그런 영화는 아니었다. 인간의 육체를 훼손하는 영화에 어느 정도 익숙한 내게도 당황스러울 만큼 무지막지한, 그것을 상상하고 화면으로 구현해내는 감독의 머리속이 궁금해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괴하다싶을만큼 유머러스하고 즐거운 영화를 만들던 그가 어느새 세련된 폭력물이나 그저그런 퓨전 코믹물만 만드는가 싶어 아쉬웠었다. 특히 <이조>, <13인의 자객>,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 같은 시대물은 기대 이하였다. <극도공포대극장 우두>, <요괴대전쟁>, <역전재판> 등 판타지를 가미한 요괴영화는 놀랄만큼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해 재미를 주긴 했지만 감동은 없었다. 그렇게 그를 잊는가 했는데 최근 <아이와 마코토>라는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그에게 빠졌다. 역시 실력있는 감독이다. 영화는 <크로우즈제로>처럼 학원폭력물인데 어쩜 그렇게 잔인한 영화에 즐거운 캐릭터들을 배치하는 것인지, 끔찍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코믹한 설정, 장면을 연출하는 뛰어난 아이디어와 놀라운 감각은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다. 그의 영화가 선사하는 가장 큰 매력은 그가 영화를 즐기며 재밌게 만들었다는 걸 관객이 고스란히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 장르가 무엇이건간에 어떤 잔혹이 화면에 펼쳐지던간에 그의 영화라면 나는 팝콘을 먹으며 실실 쪼개며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여전히 재밌는 감독이지만 예전엔 정말 멋졌던 미이케 다카시 감독(1960년생), 그가 다시 선혈이 낭자한 B급 영화의 세계로 돌아오길 기다리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영화들을 정리했다.

 

 

■ 1999년작) 오디션 Audition ; 료 이시바시, 시이나 에이히 주연 ; 비디오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는 시게하루는 몇년 전 아내를 잃고 16살난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는 42살의 홀아비다. 아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 모두 그에게 재혼을 권하지만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기는 그리 녹녹치 않다. 도대체 멋진 여자들은 다 어딨는 걸까? 실패하지 않는 결혼을 위해 상대를 신중하게 고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친구가 방법이 있다며 알려준 것이 오디션. 비디오 제작자이니 여성 다큐 비디오를 제작한다며 나이와 외모, 조건 등을 내세워 주인공을 찾자, 그리고 오디션을 보고 사람을 골라 만나보자. 그리고나서 비디오 제작이 무산됐다고 하면 된다는 것. 혹시나 하고 시작한 오디션에 화려한 프로필의 다양한 여자들의 지원서가 쌓이고 시게하루는 오랜만에 설레임을 느낀다. 맘에 드는 조건과 다양한 지원 사유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지적이며 매력적인 여자들을 골라낸다. 1차 서류심사를 마치고 30명의 오디션이 시작된다. 어떤 집안에서 자랐는지, 요리는 잘하는지, 연애는 얼마나 해봤는지, 취미는 무엇인지...사심 가득한 질문들이 오가는 가운데 시게하루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 사람, 발레를 전공했고 부상 후 음악공부를 하며 작은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아사미의 청초한 아름다움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궁금한게 있다며 추가 인터뷰를 제안하고 이후 둘은 자연스럽게 만남을 이어간다. 만나면 만날수록 참한 그녀, 거짓말로 유혹한게 미안할 정도로 순수한 모습에 매혹된다. 그녀 또한 그에게 호감을 보이면서 관계는 급물살을 탄다. 혹시 모르니 프로필에 적힌 것이 사실인지 뒷조사 좀 해보자는 친구의 말도 무시하고 연애에 푹 빠진 시게하루. 근데 여기서 반전. 카메라가 아사미의 집안을 보여주는 순간 등골이 오싹한 장면이 펼쳐진다. 역시 미이케 다카시^^ 시체처럼 앉아 하루종일 시게하루의 전화만 기다리는 그녀와 방안에 떡하니 놓여있는 정체불명의 푸대자루는 전화가 올때마다 흠찟흠찟 놀라 푸덕거린다. 결국 광기와 집착에 사로잡힌 그녀에게 시게하루는 살해당할 위기에 놓인다. 미이케 다카시는 이때부터 바늘에 매료됐던 걸까?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시게하루의 몸에 바늘을 꽂아넣는 아사미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당신도 나한테 거짓말 했잖아요. 입은 거짓말을 해도 고통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어때요, 정말 그렇죠?"

 

 

 

 

■ 2001년작) 비지터Q Visitor Q ; 엔도 케이치, 와타나베 카즈시 주연 ; 영화의 장르가 코미디, 드라마, 다큐, 공포란다. 어떤 영화인지 감이 잡히나? 미이케 다카시 특유의 능청스런 체제 전복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비디오자키인 아빠가 원조교제하는 딸을 취재한다며 모텔에 들어갔다가 근친상간이 벌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흥분한 아빠가 순식간에 일을 끝내고나서 창피한 나머지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라고 중얼거리는데 딸아이는 조루라며 아빠를 놀린다. 조루니까 돈을 더 내놓으라는 딸에게 모자란 돈은 엄마에게 받으라는 아빠. 학교 친구들에게 이지메를 당하느라 늘 상처투성이인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를 죽도록 팬다. 아들에게 맞은 상처를 화장으로 감추고 마조히스트를 위한 사디스트 알바를 하는 엄마. 벨트로 손님을 때리고 돈을 받은 엄마는 번 돈으로 정성껏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밥을 먹다 이유없이 분개한 아들에게 또다시 맞는 엄마와 그 와중에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며 또 어떤 걸 비디오로 촬영할까 고민하는 아빠. 이런 막장 집안에 어느날 Q가 찾아온다. 누군지도 모르고 왜 왔는지도 모르지만 천연덕스럽게 집안에 눌러앉은 Q는 집앞에서 이지메 당하는 아들을 촬영하는 아빠를 도와주기도 하고 엄마를 때릴 회초리를 종류별로 구비하고 있는 아들의 방에 들어가 정리정돈을 잘한다며 다독이기도 한다. 밖에서 사디스트 알바를 하는 엄마를 대신해 집안을 청소하고 그녀의 가슴을 애무해 엄마의 모유가 아직 마르지 않았음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일상화된 가족간의 무관심과 폭력도 놀랍지만 비디오 촬영을 하다 뒷골목 불량배들에게 강간당한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아빠와 끊임없이 친구들의 이지메 대상이 되는 자존심 강한 아들의 상처받은 모습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슬픈. 그런데 영화는 이 모든 걸 천진난만한 코미디로 풀어간다. Q가 나타난 뒤 미묘하게 변한 가족들. 엄마는 아들의 폭력에 맞서 식칼을 날리며 저항하고 아빠는 자신을 무시하는 프로듀서를 죽인 뒤 강간하고 토막낸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시체를 처리하는 모습이 어찌나 즐겁고 정겨운지. 온몸에 피를 묻힌 아빠와 엄마가 드디어 아들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달려들어 복수하는 장면은 그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카타르시스가 있다. 서로를 위한 복수에 동참함으로써 가족으로 똘똘 뭉치는 이 영화, 이런 내용을 보며 관객을 웃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싶은 미이케 다카시의 해맑음.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냐, 하지만 당신이니까 웃는다.

 

 

 

■ 2001년작) 이치더킬러 Ichi The Killer ; 아사노 타다노부, 오오모리 나오 주연 ; 야마모토 히데오의 만화 <고로시야 이치>를 영화화한 작품. 신체 훼손 영화의 최고봉이라 불릴 만한 영상과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모여 오랫동안 고어 마니아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야쿠자 보스가 거액의 돈을 가지고 사라지자 중간 보스인 카키하라는 그를 찾아나서는데 알고보니 보스는 이치라는 킬러에 의해 이미 죽은 상태. 이치를 추적하는 카키하라와 그런 카키하라를 견제하는 조직원에 의해 카키하라의 살인까지 청탁받은 이치의 운명적인 만남. 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한 카키하라의 이미지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함, 포스터의 얼굴이 바로 카키하라다. 찢어진 양볼을 앙증맞게 고정한 피어싱, 담배를 피우면 터진 양쪽 볼에서 새어나오는 담배연기가 인상적이다. 엄청난 사디스트이자 마조히스트인 카키하라의 엉뚱한 매력이 반전이라면, 어려서의 사고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어수룩하고 순진한 이치는 우스꽝스러운 닌자 거북이 복장을 하는 순간 뒷꿈치에 달린 칼날을 이용해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킬러로 변신한다. 평소에는 골방에서 온라인 게임만 하다 명령이 떨어지면 킬러로 변신하는 이치는 생각과 다르게 이뤄지는 자신의 폭력에 당황하고 두려움을 느끼지만 천부적인 킬링을 보여주는 킬러, 밑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 중간 보스가 된 카키하라는 폭력이라면 무엇이든 경험하고 맞붙어 싸워 이겨내려는 타고난 야쿠자. 두 사람이 만나기까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강도가 어찌나 센지 영화를 보면서 몇번이나 "미치겠다"를 연발했다. 살아있는 인간을 튀길 줄이야. 난자한 피와 내장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조각난 몸뚱아리들을 보며 특수효과팀에게 노벨상이라도 줘야겠다 싶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이치가 좋아하는 호스티스가 기둥서방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보고 분개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자위를 해버리고, 그의 정액이 호스티스의 집 베란다 화분에 떨어지면서 흥건한 정액 위로 <이치 더 킬러>라고 영화의 제목이 새겨질 때부터 나는 "이 감독, 정말 못말려~"라고 생각했다. 운명처럼 만나 신나게 피를 흘리는 카키하라와 이치, 살육전에서 패한 카키하라가 죽어가며 말한다. "이거 굉장하군!" 

 

 

 

 

■ 2005년작) 임프린트 Imprint ; 빌리 드라고, 유키 쿠도 주연 ; 마스터즈오브호러(Masters Of Horror) 시즌1에서 유일한 아시아 감독 작품으로 마지막 에피소드를 장식한 영화. 이와이 시마코의 단편소설 <정말 무서운>이 원작이다. 미국인 기자 크리스가 행방불명된 애인 코모모를 찾아 외진 섬에 위치한 창녀촌에 들어선다. 코모모라는 이름의 창녀는 없다는 말을 듣고 돌아서려하지만 배가 끊겨 하룻밤을 묶을 수밖에 없는 상황. 다른 손님들에게 외면당한채 구석에 쭈그려앉은 창녀를 지명했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눈과 입이 한쪽으로 흉측하게 찢어진 얼굴. 얼굴이 그래선가 왠지 슬픈 눈을 한 창녀에게 묘한 동정심을 느낀 크리스는 그녀의 술시중을 받는다. 아무 생각없이 "혹시 코모모를 아니?" 하고 물었는데 조심스럽게 알고 있다고 말하는 그녀. 사실 코모모는 얼마전 자살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다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택했다고. 절규하는 크리스에게 그녀가 묻는다. "코모모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세요?" "어려서 죽은 내 여동생하고 너무나 닮았거든." 그러게 코모모는 정말 예쁘고 다정했다며, 지금까지 살면서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은 코모모 뿐이었다고 말하는 그녀, "사실은 말이죠.." 마담의 반지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잔인한 고문을 당한 뒤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여기서 보여준 창녀촌의 지능적이고 고도화된 고문 장면은 두고두고, 앞으로도 다시 없을 명장면. 미이케 다카시 특유의 바늘 고문은 상식을 뛰어넘는 잔혹함으로, 놀랄만큼 아름다운 색채 미학으로 구현된다. <텍사스 살인마>의 토브 후퍼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 악몽을 꾸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 "거짓말! 창녀의 거짓말 따위 누가 믿겠어! 그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소리치는 크리스. 이때 그녀가 조용히 말한다. "사람들은 왜 진실을 알려고 할까요? 가끔은 모르는게 나을텐데. 가끔은 거짓말이 더 나은데 말이죠." 그러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실은 자기가 마담의 반지를 훔쳤지만 코모모에게 누명을 씌웠고, 코모모는 고문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을 고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문을 당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코모모를 자신이 목졸라 죽였다고. "모질게 구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친절한 건 참을 수 없었어요." 그리고 그녀의 실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매지간이면서 몸을 섞은 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던 부모님. 동네 여자들의 낙태를 도우며 먹고 살았던 엄마. 술먹고 엄마를 때리는 게 낙이었던 아빠. 그 와중에 쌍둥이였으나 언니는 동생의 머리에 손만 달린 형상으로 태어나고, 동생은 괴물같은 언니를 머리카락으로 감추고 살아간다. 의지했던 스님, 그리고 아빠에게도 강간당한 여자아이. 아빠를 죽이고 창녀촌에 흘러들어온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괴물같은 언니의 형상이 동생의 머리에서 튀어나오고 끔찍한 모습에 질겁한 크리스는 가지고 있던 총을 발사한다. 결국 실성한채 감옥에 갇힌 크리스, 지옥 같은 그 곳에서 크리스는 어려서 죽었다는 여동생과 꽃처럼 아름답던 코모모와 함께 살아간다. 세상에 인간만큼 잔인한 괴물은 없고 죽어서 천국에 가기 전까지 우리가 살아야 할 현실은 지옥일 뿐이라는. 매혹적인 스토리라인과 기막히게 아름다운 영상, 천재적인 연출력이 돋보이는 내 인생 최고의 호러, 임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