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서

야마다 에이미, 나는 공부를 못해

guno 2013. 3. 24. 08:20

 

 

얼마전 가까운 사람이 입원을 해서 병문안을 다녀왔다. 그런데 함께 병문안을 했던 지인이 일주일도 안돼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너무 놀랐다. 욕실에 쓰러진 그를 가족들이 발견했고,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다는 말을 들었을땐 나이를 먹는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어 씁쓸하기도 했다. 만성피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번 기회에 이것저것 검사를 받아보겠다며 그는 내게 병원에서 읽을만한 책을 한권 갖다달라고 했다. 지루하지 않은 것으로 하루이틀이면 읽을 수 있는 책. 그를 알아온 오랜 시간, 책 읽는 모습을 본적 없는 나로서는 그에게 지루하지 않은 책이 무엇인지 도통 알길이 없었다. 병실 티비는 하루종일 켜져있는데 책 읽을 시간이 있을까, 그냥 티비 보지? 아니야, 요즘 내가 티비를 너무 보는 것 같아서 책좀 읽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병원에 입원까지 했잖아. 이번 기회에 맘 잡고 책을 좀 읽어야겠어. 그럴까 과연 싶으면서도 머릿속으론 이미 책을 고르고 있는 나. 요즘 내가 읽는 책들은 통 재미가 없는 것들이야. 그냥 갖고 있는 것 중에 맘에 드는 게 있을지 모르겠네. 당신에겐 재미없을 인문이나 고전을 빼면 러시아와 프랑스, 일본소설이 주류긴 한데.. 오~ 일본소설? 에쿠니 가오리 정도는 나도 아는데.

 

에쿠니 가오리..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냉정과 열정사이, 반짝반짝 빛나는, 도쿄타워 등을 통해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장한 그녀는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었다. 근데 난 그녀가 별로였다. 그녀의 책은 마치 아무리 예뻐도 내 취향은 아닌 여자같았다.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코너를 장악한 일본작가들 때문에 멀미가 날 정도였던 그 때, 유명작가의 작품이 아닌것을 찾다가 우연히 보게 된 게 야마다 에이미의 <나는 공부를 못해>였다. 솔직히 제목과 표지가 맘에 들었고, 번역자가 양억관 씨라 한번 믿어보자 하고 읽게 된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재밌어서 여러 사람에게 권하기도 했는데, 에쿠니 가오리를 비롯해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등 쟁쟁한 인기작가들에 밀려 야마다 에이미도 괜찮아 라는 내 말은 메아리를 얻지 못했다. 심지어 일본소설을 좋아한다는 친구에게 선물한 뒤 읽어봤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한참이 지나서도 읽으려고 생각중이야 라는 말을 듣곤 크게 낙담했다. "난 요즘 진지한 책들이 좋더라구. 요조숙녀같은 에쿠니 가오리도 너무 좋구.." 그렇게 말하는 친구에게 "심각한게 진지한 거라고 누가 그래?" 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니까. 그래놓고 반발심인가. 누가 뭐래도 난 에쿠니 가오리 보다 야마다 에이미, 하는 고집이 생겼던거 같다. 병원에 입원한 그가 에쿠니 가오리를 언급하는 순간, 그렇다면 야마다 에이미를 갖다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17살, 공부를 못하지만 인기가 많은 남학생, 도키다 히데미의 성장소설. 미혼모인 엄마와 외할아버지와 함께 가난하게 살지만 슬프거나 외로운 것과는 거리가 먼, 즐거운 생활을 하는 도키다는 사람들이 자신을 '미혼모의 자식'이라는 그들만의 상식안에 멋대로 가두려는 걸 거부한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는 불행하다고, 미혼모의 자식은 비뚤어질 수밖에 없다고 누가 그래? '나는 나다'라고 주장하는 도키다.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에 대고 ΟΧ를 매기려 한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 정의가 아닌데도 멋대로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강요한다. 자기가 공부를 못하는 게 가난한 미혼모 가정의 아이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자기가 공부를 잘했다면 그러니까 더 열심히 공부를 하는 거겠지 하며 멋대로 판단할 거라는 걸 도키다는 알고 있다. '나는 내 나름대로 가치 기준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기준에 세상의 정의를 끌어들이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을 거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모든 것에 Ο표를 치자.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그런 다음 천천히 Χ표를 선택해가는 거다.'

석양을 보며 허무를 생각한다는 우에구사라는 친구가 있다. 까뮈를 좋아하는 책벌레 우에구사가 부회장인 레이코와 사귀다가 채인 이유가 데이트 도중 레이코가 아파서 안절부절 못하는데도 그가 외국 작가의 이야기를 떠들어댔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된다. "잘난척, 아는척, 불행하다고 폼을 잡잖아. 햄릿도 아닌 주제에" 레이코의 말을 들으며 도키다는 생각한다. '그녀의 심정을 알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의 아픔도 위대하지만 몸의 아픔은 보다 완고하다. 존재감이 있다.' 감기에 걸려서 열이 나면 간호해주는 엄마에게 고마워할 마음도 생기지 않고 숙취가 심하면 고상한 고뇌도 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왜 늘 몸보다 마음이 대단하다고 하는 걸까, 슬픔 또한 건강한 자의 특권이라고 말하는 도키다. 

전교 남학생들의 추앙을 받을만큼 예쁘고 얌전한 마이코에게 고백을 받았건만 "난 너처럼 자신이 예쁘다는 걸 알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연기하는 여자애에겐 관심이 없어"라고 말했다가 되려 "너도 자유롭고 쿨한척 연기하는 주제에!"라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 도키다. '나야말로 자연스러움을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람들에 대한 아부가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한 아부로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하고 고민하는 도키다.. 이렇게 진지한 주인공이 나오는데 이 책이 진지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단순해서 유쾌하고 솔직해서 사랑스러운 17살의 도키다와 그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맘에 든다. 특히 피로하지 않은 가족들의 캐릭터가 무척 맘에 들었다.

"할아버지, 우리집 가난하지?"

"가난뱅이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야"

"그걸 평생 계속하는 걸 가난하다고 하는 거야"

"잔소리말고 먹기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