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서

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

guno 2013. 4. 13. 10:23

 

 

 

2001년 일본에서 출간된 아라키의 책이 십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한국의 팬들에게 도착했다. 2001년도 산이라니, 에구.. 너무 오래 전 책이 아닌가 했는데 발랄한 아라키의 수다를 바로 옆에서 듣는 듯한 책의 내용을 읽으며 즐거웠다. 이 책은 아라키의 팬들에게 좋은 선물이겠구나 싶다. 사진가의 책인데 사진이 거의 없고 수다만 잔뜩 담겨있는 책. 곱슬머리 배불뚝이에 야한 걸 밝히는 늙은 할아버지인 주제에 호기심이 왕성하고 귀여운 아라키의 사진이야기. 사는이야기.

 

사진은 일종의 인터뷰입니다. 인터뷰라는 것이 상대로부터 무엇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사진은 인터뷰와 똑같습니다. 표현이 아닌 표출, 그러니까 상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무엇을 끌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사진으로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이미지로서의 얼굴을 담아내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끌리도록 깊은 속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지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동화(同化) 같은 게 아니라 이화(異化) 작용이라 할까요. 지금까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을 찍는 사람과 대상이 협력해서 새롭게 탈바꿈시켜 내미는 것입니다. 사진은 그것을 찍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의 공동작업인 셈이지요.

 

내 자신의 경우 몸이 카메라가 됩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을 때 눈이 카메라 렌즈가 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장소에서든 사진기의 메커니즘에 의지해 렌즈를 바꾸지 않아요. 렌즈라는 것은 카메라 메커니즘의 일부로서 렌즈를 바꾼다는 것은 카메라를 의식하는 것인데요. 나의 경우는 촬영을 하고 있는 도중엔 카메라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의식이 없어져요. 나 자신이 이미 카메라에 들어가 있으니까요. 자기 몸 안에 카메라가 들어가 있든지 자기 자신이 카메라이든지.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 렌즈를 바꾸는 게 아니라 자신이 몸을 숙이거나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하는 것이지요. 사진은 자신의 몸으로 찍는 것이니까요.

 

실제 촬영현장에서는 모델이 있는 곳에 가서 속삭입니다. 일부러 소곤소곤 속삭이러 가곤 해요. 뭔가 이렇게, 여기에서는 이렇게 하는 수작이죠.(웃음) 그렇게 속삭이고 나서 다시 카메라 위치에 돌아오는 거에요. 이것이 여자 얼굴을 예쁘게 만드는 가장 좋은 요령이에요. 역시 꼬드기러 가지 않으면 안돼요. 하하하. 멀리서 "좋아요" 라든가, "목덜미가 예뻐"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소용없어요. 곁에 다가가서 숨을 내쉰다든가 그래야 하는 거에요. 한마디 말도 그렇지만 만진다는 것도 중요해요. 여배우라든가 모델을 찍을 때는 코디네이터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모델의 머리 모양을 고치거나 하는데 촬영 중에 그런 건 절대 안 된다고 정했어요. 내 경우엔 직접 만지러 가죠. 점점 다가가지요. 내가 갑니다. 이쪽에서.

 

포트레이트 Portrait ; 그림에서 초상화를 말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사진 용어로 널리 쓰인다. 인물의 얼굴이나 모양을 있는 그대로 찍거나 형태의 아름다움이나 일종의 분위기, 또는 인물의 성격이나 생활, 인간성을 표현하는 것 등 다양한 인물 촬영을 포함한다.

 

역시 사진가는 마지막에 포트레이트로 가는 거에요. 애써 여자의 알몸을 찍었지만 마지막에는 얼굴만 찍는 거죠. 밀착을 보면 거기가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해서 찰칵 하고 넓적다리를 벌리게 하고 한가운데를 찍어요. 하지만 그 뒤에 보면 마지막엔 얼굴이에요. 젖가슴도 등장하고 음모도 있어요. 그렇지만 마지막에 찍은 사진은 얼굴, 결국 셀렉하는 사진도 얼굴이에요. 아깝기 이를데 없지요. 하하하. 그리고 옷을 입었을 때의 얼굴과 한시간 정도 알몸으로 지내고 난 뒤의 얼굴은 또 달라요. 말을 바꾸면 좋은 얼굴을 찍고 싶기 때문에 알몸이 되게 하는 거에요. 대개 아래쪽이 알몸이 되면 얼굴도 꾸밈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누드를 찍어놓고 얼굴 사진을 쓰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지만 하반신을 벗고있는 사진은 버리지 않고 잘 모아두고 있어요. 아까워서. 하하하. 마지막에 얼굴과 하반신, 둘중 어느 쪽을 버릴 거냐고 묻는다면 얼굴은 버리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얼굴과 누드, 얼굴과 육체라고 한다면 전혀 말이 되지 않아요. 얼굴이 없는 누드와 얼굴이 있는 누드겠죠. 역시 얼굴이 있는 누드가 좋아요.

 

사진을 찍다 보면 대상이 좋아할만한 모습을 찍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대상이 결코 찍히고 싶지 않았던 걸 찍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 나의 셀렉 기준은 대상이 사진을 보고 기뻐할만한 것을 고른다 에요. 골라서 공개할 것을 정한다는 건 결국 공개하지 않을 것을 고른다는 식으로도 말할 수 있는데요. 대상이 싫어할 것 같은 건 아예 찍히지 않았던 것으로 하는 거죠. 얼굴은 그 사람의 상표니까요. 존중해야 해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진을 찍을수 있는 방법은 있어요. 찰칵 찰칵 찰칵 하고 세발짝 정도 떨어진 곳이 승부처지요. 그쯤에서 상대에게 적이 아니란 걸 알게 해주는 거에요. 낯선 사람 앞에서 떡하니 삼각대를 세우고 망원렌즈를 들이미는 건 안 돼요. 길가에 앉은 할머니를 찍으면서 삼각대를 세우려고 하면 싫어해요. 예쁘지도 않은데 뭘, 궁상스러운데 왜..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을 찍는다, 따뜻한 인간을 찍는다, 그럴 땐 카메라를 들고 내 몸이 가까이 다가가는 거에요. 내 몸으로 zooming을 하면 몸이 언어가 되요. 표정같은 게 아주 잘 통하지요.

 

나는 사진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찍는다든가 밑에서 올려다보고 찍는다든가 하는 건 가급적 피해요. 수평지향이랄까요. 특히 내려다보는 건 안 좋아해요. 그렇다고 해서 올려다보는 것도 좋지 않고요. 히틀러처럼 우쭐대는 거니까 말이에요.(웃음) 히틀러 사진을 보면 전부 밑에서 찍었어요.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은 없어요. 사진의 느낌은 올려다보며 찍었는지 내려다보며 찍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도 해요. 완전히 거기서 판가름나기도 한다니까요. 그래서 내 경우엔 반드시 시선을 똑바로, 수평지향이란 느낌으로. 그게 나의 기본이면서, 그걸 좋아해요.

 

역시 사진에는 날짜가 들어가면 좋아요. 들어가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요. 저쪽 서구에서는 그런 걸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돼요. "좋으니까 좋잖아" 하고 말하면 왜 그런가를 설명해달라고 하지요. 설명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걸 설명한다면 시시해지잖아요. 뭐랄까 좀 신비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수께끼라든가 뭔가가 없어지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더라도 미적지근한 게 없으면 재미없어요. 무책임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게 예술이니까요.(웃음) 예술가라는 자들은 알고나면 재미없거든요.(웃음)

하늘사진, 바다사진에 숫자나 날짜를 입력하는 걸 좋아해요. 자연이란 건 우선 구상이죠. 그리고 추상적이기도 하고요. 숫자랄까 날짜는 구체적으로 보이지만 우선 추상이거든요. 근데 두 개를 나열하면 매우 구체적인게 돼요. 추상이 아닌게 돼요. 구체적이고 현실같은 게 돼요.

 

사진이라는 작업 안에는 거짓과 참, 허실이 섞여 있어요. 그래서 나는 여하튼 셔터를 무심코 누르기만 할 뿐이지 나에게 주체성은 없어요. 주체성은 대상에 있다는 사실, 이야기는 찍히는 쪽에 있는 거지 내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무엇이 주관이고 무엇이 객관인지 가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거지요. 어쩌면 나에게는 객관성이라는 게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무언가를 기억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 경우에는 찍는 순간에 기억이 사라져요. 내게서 기억이 없어져도 좋아, 기억은 사진기가 하니까요. 그래서 어쩌면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어서 사진을 찍는지도 몰라요. 사진이 되는 것으로 새로운 기억이 나와주니까.

 

진지하게 말하자면 사진은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거에요. 사진과 현실은 다르죠? 사진은 현실에 의해 촉발된 무엇인 겁니다. 거짓말 쪽이 현실에 가까운 경우도 있으니까요. 사진속의 현실은 환실(幻實)이에요.

 

세계의 사진가 10명이 감진 스님을 찍는다는 기획으로 나라의 도쇼다이지에 다녀왔어요. 경내에 있는 다른 보살상이라든가 여래부터 찰칵 찰칵 찍기 시작했어요.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얼굴이 썩었거나 갈라져 있거나 손이 없거나 했는데 나는 그런 거에 끌렸어요. 여래형입상이라는 불상은 머리가 전혀 없었는데 혹시 이걸 제작한 사람은 천년 후에 이 불상을 보는 사람을 예상해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머리가 없는데도 마냥 끌렸어요. 처음에는 이 불상의 허리부분, 그러니까 허벅지 근처의 관능미에 눈이 가더라고요. 이 불상을 만든 사람은 반드시 호색가일 거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말하면 불경스러울지 모르지만 불상은 육감이랄까, 여자의 관능을 표현하려 했다고 생각해요. 불상이라는 거 에로죠? 사람을 구제한다느니 뭐니 말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이 세상은 쾌락이니까.(웃음) 불상은 이 세상의 쾌락을 위해 있는 게 아닐까요. 아차, 화내시려나, 나한테? 그러면서 찰칵 하고 찍는 거지요. 관능상이랄까, 관음상이랄까를. 처음엔 시선이 허벅지로만 가더라고요. 근데 계속 찍어가다보니 있을리 없는 목 위 부분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어떤 얼굴이었는지 이미 잊었지만 얼굴이 보였어요. 얼굴이 없는 포트레이트를, 번쩍 하고 뭔가 보인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서 지금이다! 하면서 셔터를 누른 거죠. 그리고 촬영을 그만뒀어요. 이걸로 끝이야 하면서. 그때는 말을 안했지만 감동으로 조용히 흔들렸었지요. 사진이.. 하하하.

 

내 사진의 경우 누구나 바로 아라키 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보는 사람이 그 사진에 몹시 취해서 찍은 사람의 입장 같은 거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되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어요. 근데 난 환갑이 지났는데도 아직 나야, 나란 말이야, 라는 게 아직 있어요. 입으로는 무(無)가 되고, 자기가 사라지는 것같이 말하면서도 내 사진이다! 라는 걸 나타내고 싶어해요.

 

집중이란 건 도취에요. 근데 취하면 안돼요. 냉정한 자기가 있어야 해요. 그래서 사진은 말이죠. 도취한 자신을 보고 있는 자기가 없으면 안돼요.

 

내가 찍은 사진에 내가 용기를 얻어요. 다른 사람 사진이 아니라 내가 과거에 찍은 사진을 보고 뭐라 할 마음이 생기는 거죠. 지금을 위해 옛날에 씨를 뿌린 것 같아요. 예전에 해놓은 것이 지금 이렇게 나를 찾아올 때 체력이 없으면 안돼요. 이렇게 좋은 느낌이 드는데 체력이 없으면 아쉽죠.

 

 

아라키가 촬영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치치 칵테일을 경험하고 '서울의 밤은 치치チチ(젖가슴) 칵테일'이었다고 썼는데 그게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술집에 갔는데 여자들이 들어와 윗옷을 확 걷어올려서 젖가슴을 보여주고 스커트를 싸악 내려서 음모를 보여주고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더라며. 그래서 그중 맘에 드는 사람을 지명했더니 테이블 위의 술을 잔에 적당히 붓고 그 잔을 자신을 젖가슴으로 덮어 휙휙 흔들어 칵테일을 만들어주더라며.. 십여 년 전 대한민국 서울의 술집 서비스가 나를 놀래켰다. 이러고들 노는거야? 몰랐다. 아직도 수양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