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책이 엄청 쌓여있다. 읽다만 책들이 두서없이 쌓여 키보드를 포박하고 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요즘 내가 선택하는 책들이 문제인지 아니면 내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중간에 덮은 뒤 나중에 읽으리라 하고 쌓아두다보니 이 모양이 됐다. 다 읽거나 아니면 더이상 읽지 말아야겠다고 결론이 나야 책상에서 치울텐데 이도저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의 책들. 종점에 가지 못하고 정류장에 남겨진 책더미가 이제는 숙제처럼 느껴질 정도다. 뭔가에 집중하고 싶어서 두리번거리다 책을 사긴 하는데 읽다보면 금세 시큰둥해진다. 그리곤 금방 다른 책을 펼치는데 그것도 영 재미가 없다.
얼마전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겨우겨우 끝까지 읽었다. 마음 약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쳐서 재산을 탕진하게 하고 마지막에는 사기에까지 끌어들이고 안되면 죽이길 서슴치않는 검은 조직을 추적하는 이야기.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재밌지도 않은. 패륜을 일삼는 검은 조직의 행태가 놀랍고, 사기에 걸려들어 맥없이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씁쓸해서 읽긴 했지만 무언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 없이 겉핥기였다. 사건은 엉성한데 사건을 파헤친답시고 돌아다니는 주인공의 취향이 부각되는, 반전의 재미를 위해 주인공의 신변잡기를 들먹거리다 정작 사건은 구체성을 잃고 미완성이 됐다. 작가가 공들인 반전 또한, 이후에 쓰여졌으나 나는 이보다 먼저 읽은 <밀실살인게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캐릭터의 함정이라 그다지 재밌지 않았다. 추리소설의 묘미가 충격적인 사건의 나열, 깜짝 반전에만 있는 건 아닐텐데 어째서 사건을 깊이 파헤치거나 인물속으로 좀더 들어가지 않는 걸까. 왜 이 주인공은 이토록 멋만 부리는 걸까 싶었다.
요즘 책들은 글자도 크고 자간도 행간도 넓직넓직하다. 읽는 이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마당문고, 범우사, 문예출판사 등의 문고본으로 독서를 시작한 나는 책을 펼쳤을때 구멍이 뻥뻥 뚫린 것처럼 휑한 책은 오히려 읽기가 어렵다. 간격이 넓은 징검다리를 만난 것 같아서 생각도 널뛰기를 한달까. 집중이 안되고 자꾸 딴 생각을 하게 된다. 우타노 쇼고의 책이 그랬다. 이야기를 잘 따라가다가 저자의 취향과 고집이 드러나는 순간 글자의 간격이 벌어져 보이면서 집중력을 흐트렸고, 그 사이로 독자의 비평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만들어졌다.
일본 추리소설의 매력은 취재도 꼼꼼하게 잘하고 접근방식도 매우 훌륭하다는 점이다. 특히 인간의 어두운 심리를 파헤치고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는 데는 민족 특유의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독자를 법원의 방청객처럼 만드는 작가들이 종종 있다. 피고인과 피의자, 증인과 증거, 검사와 변호사의 설전을 들으며 사건의 개요를 이해하고 곰곰히 생각을 좀 하려는데 탕탕탕 망치를 휘두르며 저자가 판결을 내려버리는 순간 아참, 나는 방청객일 뿐이었지 하고 책을 덮어야 한다. 책을 읽고나서도 더이상 생각할 거리가 없다. 이미 판결은 났으므로. 그러니 시간을 들여 책을 읽었는데 기억에는 남지 못한다.
나는 마지막까지 독자와 함께 고민하고 책을 덮은 뒤에도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작가가 좋다. 혹은 자간이 느껴지지 않을만큼 치밀하게 이야기 뒤에 자신을 숨기는 작가들이 좋다. 그러나 우타노 쇼고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거침없이 판결을 내리는 작가여서 나는 이 책이 즐겁지 않았다. 게다가 저자의 반전을 더욱 스펙타클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 분명한, 완벽한 공범이 되기로 작정한, 지나치게 아름다운 표지 덕분에 더욱더 이 책이 맘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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