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커피를 마시려고 전기주전자에 물을 올려놓고는 그냥 나와버렸다. 한참 뒤에야 전기주전자를 켜놓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오후엔 시간이 나서 모처럼 커피 한잔 마셔볼까 하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휴게실로 들어서는데 문턱에 걸려 넘어질뻔 하고 커피는 바닥에 쏟아버렸다. 엄청난 기세로 흩어진 커피는 닦아내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집에 돌아와 잠시 숨을 돌리니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 그리고 고요함.. 맥주 한잔 할까 하고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내 컵에 담고 돌아서다가 슬리퍼에 걸려 넘어져 또 한번 맥주를 쏟았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 하루종일 이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서 잠시 웃었다. 바닥을 닦고 잔에 남은 맥주를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사쿠라기 시노의 <굽이치는 달>이 있다. 어제 이 책을 다 읽고 조금 먹먹해졌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에 공감했고 작가의 뛰어난 연출력에 감동했다. 그동안 내팽개치고 있던 블로그에 들어가 이 책에 대해 쓰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지금,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바라보면서 구구절절 수다를 떨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인생을 살아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싶다. 그리고 묻는다. 준코, 너는 정말 행복했던 거니? 어느새 서늘해진 이 밤에 빗소리를 들으며 맥주 한모금에 감기약을 털어넣으며 생각한다. 나는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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