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분명 겨울비인데 따뜻하다. 니트 두 개를 껴입었을 뿐인데 땀이 살짝 날만큼. 부산의 겨울은 서울의 늦가을 같다. 추위를 싫어하는 내게 안성맞춤. 기분좋게 빗길을 걸어 집에 오다가 가는 길에 있는 기나긴 계단을 앞에 두고 서서 잠시 생각했다. 오늘은 계단을 오르고 싶지 않아. 돌아서 택시를 잡아야지 했는데 낯익은 마을버스가 먼저 왔다. 생각없이 올라탔다. 그런데 버스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잘못 탔다. 젠장. 어둔 길을 달려 순식간에 청사포 종점에 도착한 마을버스. 새까만 바다에 배들이 종종종 줄지어 묶여있고 그 앞에 조개구이집들이 성황이다. 가게 앞에선 아줌마들이 번개탄에 불을 열심히 붙이고 있고, 가게 안은 즐겁게 건배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아저씨들이 가득이다. 그러게. 술 한잔 하기 딱 좋은 날이 아닌가.
어떻게 돌아갈까 하고 두리번거리다 발견했다. 조개구이집들 사이에 뜬금없이 자리한 아담한 케이크 가게. 마치 파르나서스 상상극장에서 튀어나온듯한 작고 예쁜 케이크 가게다. 도레도레, 무슨 뜻일까? 지난번에 왔을땐 없었는데. 언제 생긴걸까. 가게 앞 작은 벤치에서 비를 맞고 앉아있는 화분들이 예뻤다. 이끌리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큼지막한 색동 케이크들. 예쁘구나. 맘에 든다. 가격은 비싼데 크기가 만만치 않다. 푸짐한 케이크 한조각과 라떼 한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비에 젖어가는 밤 바다를 바라보며 달고 맛있는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이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아주 괜찮다. 결국 케이크 한 조각을 다 먹지 못하고 포장해 달라고 해서 들고 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이고 가게에서 찍은 케이크 사진을 확인했다. 헉, 촛점이 흔들린 사진. 겨울이라 추워서 그랬다고 변명하고 싶은데 춥지 않다. 젠장. 손가락도 나이를 먹나보다. 뭐 그래도 괜찮다. 나는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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